뛰어 봤자 벼룩이야

어렸을 때 자주 아버지의 고향 춘천으로 성묘를 가곤 했다. 언젠가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날이 있었다. 어른들은 나에게 ‘저쪽’으로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저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른들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앞을 향해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달렸다. 대낮이었지만 한적한 시골이었기 때문에 길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기도를 했다. […]

Continue Reading

레드 유나이티드 군단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여파로 당시 중학교 학생들은 축구에 미쳐 있었다. 2학년 때 나는 우리 반을 반 대항 축구 대회에서 우승시켰다.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결승전은 진흙탕 속에서 진행되었다. 전, 후반전 모두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에서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3학년 때 대망의 월드컵이 열렸고 우리는 ‘레드 유나이티드’라는 축구팀을 창설했다. 유니폼을 학교로 배송시킨 나를 향해 담임은 “왜 단체로 옷까지 […]

Continue Reading

사소한 건 과할수록 좋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대결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 대결은 바로 포켓볼로 웃기기! 우리는 마음껏 헛짓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파리만 날리는 당구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한산했다. 주인밖에 없었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 차례인가?” 그리고 얼른 큐대를 버리고 옆에 있던 대걸레로 쳤다.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피했다. 친구 녀석은 재빠르게 신고 있던 슬리퍼로 쳤다. 나는 […]

Continue Reading

폭주의 핼러윈

급작스럽게 비보를 접했다.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발생한 패러세일링 추락 사고로 인해 한국인 세 명 중 두 명 사망, 한 명만 기적적으로 회생. 그 유일한 생존자가 내 친구였다. 이 소식은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기상 악화로 판단되면 보트 쪽에서 자신들의 배가 뒤집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직접 줄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친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알고 지낸 아이로, […]

Continue Reading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남자들은 편하다. 편한 게 너무 많다. 남녀의 정신 연령이 일반적으로 4살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를 제외하더라도, 남성은 여러모로 편한 게 많아 어른이 되어서도 철이 없는 측면이 있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여자들이 불편한 게 많다는 얘기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힘도 세고 호르몬도 극단적이며 생리도 없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도 유리하다. 물론 남성에게 불리한 것들도 있을 […]

Continue Reading

웃음에 영혼을 판 남자

나는 존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웃음에 있어서만큼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마츠모토 히토시다. 일본의 전설적인 코미디언 콤비 다운타운의 멤버로 초현실적이고 전위적인 개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남자다. 그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인해 연예계와 방송가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물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과거에 대한 동경과 향수에 빠진 한낱 무지한 늙은이가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

Continue Reading

나른한 고백은 사양한다

성년의 날 즈음이었다. 그 자식은 아무도 없는 노천극장에 앉아 나에게 고백을 했다. “나 사실 너 좋아해.”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며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동시에 안쓰러웠다. ‘너 빨리 수염 안 밀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제야 슬슬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가 아니라 ‘잠깐만, 이놈이랑 나랑 목욕탕도 자주 다니고 그랬는데? […]

Continue Reading

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

바닥에 사람이 쓰러졌다. 장소는 다름 아닌 교회. 나는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저씨, 좀 일어나 봐요.”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교회에 살던 노숙자로, 병원은 한사코 거부했다. 단지 배가 고파 기력이 없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넛 한 박스를 사다 줬다. 도넛을 본 그는 잠시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음, […]

Continue Reading

반항하지 마

어느 날 역전을 서성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눈에 봐도 가출 소녀들이잖아.’ 여고생들이었다. 이제 갓 중학교 정도를 졸업한 연령의 아이들이었다. “죄송한데 차비가 없어서요. 천 원만 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문득 일전에 경험이 떠올랐다. ‘지갑을 잃어버리셨구나. 얼마면 될까요?’ 그때 난 멍청하게도 진짜로 차비가 필요한 줄 알았다. “차비할 거 아니잖아. 밥 먹었어?” 소녀들은 망설였다. […]

Continue Reading

격동의 만 나이

국내에서는 1962년부터 이미 법적으로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소위 ‘한국식 나이’를 혼용하여 쓰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가 정한 법적 기준안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 공식 연령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햇수가 넘어갈 때마다 전 국민이 동일하게 나이를 먹는 문화적, 관습적 현상은 꽤나 기이한 일에 해당합니다. 각기 다른 생일을 가지고 […]

Continue Reading

청춘의 클럽

우리는 항상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곤 했다. “테이블 잡고 노는 거 왜 이렇게 비싸냐?” 비책을 떠올렸다. “클럽 갈 때 테이블 들고 갈래?” “그러려면 사람 몇 명 더 불러서 집에 있는 상 들고 가야 되잖아.” “세상에 상 들고 들어가는 애를 들여보내는 바운서가 어디 있니?” 섹시한 미녀들을 꼬실 계획도 세웠다. “웨이브 댄스를 추다 마지막 웨이브 동작에서 은근슬쩍 […]

Continue Reading

헬조선은 없다

한국은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이 되었다. 경제 규모는 대략 10위이며(명목 GDP와 실질(구매력) GDP를 고려했을 때, 그리고 그를 1인당 GDP로 환산했을 때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에 있어 우리는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과 함께 세계 10대 ‘선진 대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다수의 국제기구들은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앞에 K마크를 붙이지 않는 […]

Continue Reading

온 세상을 다 가져 봐

과거 손석희 아나운서는 모 방송에서 “저는 중립입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저는 인본주의자입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걸 본 누군가는 나에게 무슨 주의자냐고 물어봤고 나는 이기주의자라고 대답했다. 맞다. 나는 이기주의자다. 아니, 사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이기주의자다(손석희 아나운서가 인본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약자의 편에 서서 거악에 맞서 싸우는 행위는 분명 고맙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숭고하지는 않다. […]

Continue Reading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분명히 긴장되는 일이다. 떨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학교나 회사에서 앞에 나가 발표를 하다 방귀를 뀌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움의 힘이란 실로 대단해서 ‘하긴 굳이 입으로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할 필요는 없잖아? 저 친구 되게 창의적이네.’라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음이 잘 되어야만 비로소 […]

Continue Reading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이십 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꽤나 즐거웠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새벽까지 놀기도 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을 자주 놀리고는 했는데, 한번은 도서관 주차장에 숨어 있다가 어떤 여자애가 나오자 일제히 일어나며 “성형해!”라고 외쳤다. 되게 착하게 생겼던 걸로 기억되는 그 여자애는 그 말을 듣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백 번, 천 번 사과할 일이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살면서 저지른 악행 중 […]

Continue Reading

우리 집 기타는 항상 새 거야

오래전부터 아버지에게는 고질병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전증이었다. 의도치 않게 팔이 떨리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실생활에서도 불편함을 겪었다. 칠판에 글씨를 쓰지 않는 이상한 선생님, 우리 아버지. 언젠가 꽤나 오랜만에 돌아온 부모님의 집에서 나는 새 악기를 발견했다. 기타였다. 번쩍거리는 새 기타였지만 좀처럼 연주되지 않았다. 방 안에 덩그러니,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과거 아버지에게는 꿈이 있었고 재능이 있었다. 어머니와 […]

Continue Reading

아버지의 꿈

매일같이 혼이 나는 바람에 어린 시절의 누나와 나는 항상 기죽어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내가 쓴 원고더미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고, 나는 말없이 엎드려 조각들을 주워 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차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번, 아버지는 양철통으로 누나의 머리를 내리쳤다. ‘의외로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잖아?’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아버지는 […]

Continue Reading

매미는 시끄럽게도 울었다

부모님은 한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살았다. 자상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학교에서 체육부장을 맡을 정도로 엄격했다. 유아 시절, 나는 아기 시늉을 한다고 혼났다. 그렇다고 “저 실제로 아긴데요.”라고 항변할 순 없었다. 유치원생 시절, 태권도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대련을 하다가 얼굴을 찼다는 이유로 두드려 맞았다. 이미 바닥에 쓰러졌는데도 계속해서 맞는 바람에 얼굴이 책장 속으로 처박혀버렸다. 나는 차마 거기서 […]

Continue Reading

도쿠마루 고등학교

부푼 가슴을 안고 참석한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장의 훈화를 들었다. “여러분, 모두 인 서울 4년제나 전문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장이 전문대 나온 거 아냐?” 면학 분위기는 개판이었고 나 역시 친구들과 장난과 월담, 집에 갈 때 몰래 남의 봉고차 뒤에 올라타 언덕 내려가기, 힘없는 고물상 할아버지가 끄는 리어카 한가운데에 […]

Continue Reading

엘리트 건달이 되자

아베 슈지의 만화 <엘리트 건달>에는 카와이 세이야라고 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돈만 밝히는, 출세할 수만 있다면 모두를 이용해 먹는, 그야말로 세속의 끝을 보여주는 남자다. 대망의 도쿠마루 고등학교 졸업식 날, 바로 이 사고뭉치, 이 이상한 남자는 졸업생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 연설을 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지난 3년 동안 공부와 부 활동에 전력투구를 했다느니,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을 […]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