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맑음

나는 공항철도에서 쇼핑백에 든 향수를 만지작거렸다. 향수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내일 항공권 끊어서 너 있는 곳으로 갈까?” “아냐. 나 혼자 시작한 여행이니까 나 혼자 끝내게 해줘.” “알았어. 그럼 올 때 마중 나갈게.” 지독한 짝사랑이었지만 그녀를 데리러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비행기의 굉음과 함께 사람들은 하나 둘 입국장으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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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하늘의 종이비행기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 모든 이야기들을, 수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이 이야기들을 길게 쓰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가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살을 덧대어 추억에 생채기를 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속으로 긴 문장들을 수백, 수천 번 되뇌어봤지만 그렇게 복기하는 작업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흐르고 있음에도 나는 아직도 가끔 악몽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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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부터 최순실까지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누군가는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 게이트’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탄핵’이나 ‘하야’를 요구할 게 아니라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한다고 했다. 사회는 현재 완벽한 카오스다. 사실 ‘광우병 사태’ 때 벌어진 대규모 시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누가 갑자기 쌍욕을 하면 바로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외계어를 하면 일순간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단박에 화가 나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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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잉 비보잉

코끼리가 그려진 헐렁한 바지를 입고 돌아다닌 태국 여행. 방콕에서는 뚝뚝을 잡아타고 사원과 왕궁, 야시장 등을 즐겨 찾았다. 한번은 시장 골목에 있던 한 바에서 DJ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에 들어가 음료를 주문했고 DJ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애’라고 소개했다. 이후 많은 바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어딜 가나 서양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태국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서양인들이 많이 몰려있던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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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백인

고등학교 때 처음 싱가포르에 사는 한 살 많은 누나와 채팅을 하게 되면서 채팅의 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채팅의 역사는 국제 연애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미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터키, 폴란드, 스페인,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 수십여 개국의 여성들과 채팅을 했다. 그중 연애로 발전한 경우도 수차례 있었다. 나는 자타공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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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레전드

내게 있어 일본은 꽤나 심심한 곳이었다. 평온했지만 평온하기만 했다. 예상했던 거 이상으로 양국의 토양은 비슷했다. 별 거 없었다. 오사카에서 쇼핑을 했고 맛집을 찾았다. 온천도 즐겼다. 교토에서는 여러 사찰을 방문했고 주택가를 탐방했다. 사진을 찍었다. 모든 포즈가 다 똑같았다.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멀뚱히 서있었다. 어디를 가나 계속해서 똑같은 포즈만 취했다. 나중에 그 사진들을 모아 합성을 했다. 병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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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메이킹 바닐라

필리핀 마닐라국제공항에 입국했다. 때는 자정을 넘긴 시각.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이 있는 마카티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흥정의 전쟁터였다. “1200페소!” 그때 뚱뚱한 남자가 다가왔다.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300페소!” 그는 수백 미터를 달린 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바꾸었다. “마카티까지 900페소야.” 언성을 높여 싸웠다. 그는 택시를 돌린다고 했고 내가 그러라고 하자 실제로 돌렸다. ‘그렇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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