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뭐길래

여름은 고통의 계절이다. 무지막지한 더위와 습기,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후텁지근함, 모기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 공해와 같은 매미 소리, 높은 불쾌지수…… 한국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여름이 주는 불쾌감과 끔찍함은 비슷할 것이다.

겨울이 더 나은가, 여름이 더 나은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의 경우는 겨울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겨울은 추우면 패딩이든 뭐든, 몇 겹이고 껴입으면 견디는 게 가능하지만 여름은 길 한복판에서 옷을 다 벗고 살가죽까지 벗어도 덥잖아. 간단히 설명하면 그렇다. 이외에도 여름이 싫은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아이스크림이 빨리 녹는다. 숨쉬기가 어렵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 쉽게 지친다.

이만큼이나 여름은 고통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 모든걸 전복할 수 있을 만큼 여름을 기억하고 그립게 만드는 것은 여름에 사랑했던 기억들이다.

2016년은 5월부터 서울, 경기 지역 폭염주의보가 내렸던 해였다. 그해 7월은 지독하고 끔찍했다. 그 즈음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회화 스터디를 다녔다. 여름에 가게 되면 짜증이 솟구치고 남아있던 모든 인류애를 잃게 된다는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스터디가 끝나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후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끄럽고, 치이고, 덥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속눈썹 사이사이를 자꾸 파고들었다.

그때, 까만 얼굴을 한 그를 봤다. 그을린 피부를 한 그가 웃으면서 다가와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를 찍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스터디원 모두와 번호를 교환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대로 찡그릴 수도 웃을 수도 없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번호를 찍어 주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그는 곧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단둘이 맥주를 마시게 됐다. 맥주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귀게 되었다. 사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맞추게 되었다.

그 모든 과정에 여름이 있었다. 텁텁하고 습하고 뜨거운 공기를 마시면서 강남역 근처의 스무디 카페 앞에 서있으면 땀흘리며 달려오는 그 애가 보였다. 웃으면서 맨손으로 땀을 훔쳐줬던 기억이 난다. 그 즈음에는 강남에 갈 일이 굉장히 많았는데, 누군가를, 그리고 걔를 기다리는 동안 너무 덥고 지쳐서 짜증을 떨쳐 낼 수 없을 때면 니코앤드로 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면서, 구경을 다하면 후아유 매장으로 갔다. 사지도 않을 옷을 만지면서, 매장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내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그 노래를 들을 때면 2016년 여름에 후아유에 서 있는 내가 된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얼마 전 <그해, 여름 손님>을 봤다. 내가 겪었던 그 여름과 결은 다르지만, 어쨌든 나의 여름이 생각났다. 엘리오의 여름과 나의 여름. 여름이란 뭘까. 그땐 정말이지, 여름이 끔찍했다. 다시는 이런 여름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기억속에 남아 있는 여름은 그때 뿐이다. 시원한 에어컨이 내내 나왔던 회사에서의 2017년 여름이 아니라.

숨막히는 땡볕을 피해 시원한 가게로 숨어서 그 애를 기다리던 시간이 설레는 맘으로 가득 찼던 것이 신기했다. 잡은 손에 땀이 차는 데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는 길었던 그 애의 머리칼은 검고 숱이 많았다. 지금보다 통통했던 나는 짧은 원피스를 자주 입었다. 이번 여름은 너무하다고, 그런 얘기를 나눴다. 함께 더위에 지쳐 헥헥 거리면서 강남의 길거리를 걸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약 2년 사이에, 나도 변했고 우리의 관계도 변했다. 언제까지나 처음 같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여름이 오고 있다. 여름이란 뭘까. 여름이 뭐길래 이렇게 그리운지. 분간하기 어렵다. 2016년의 여름과 새로이 마주하게 될 여름 중 무엇이 반가운지.

어쩌면 여름 햇살처럼 그렇게 뜨거운 날에 만나고, 견디고 사랑했던 기억들이 그 온도를 함께 간직하고선 내 안에 남아 있는 건 아닌지, 소설에서도 그들이 열렬히 사랑했던 계절, 고통스러워 했던 계절은 여름이 아니었던가.

여름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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