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i탈조선記 : 시칠리아 9191km episodio 1. 알리탈리아

알리탈리아(Al’italia)의 체크인 데스크에 줄을 섰다. 일찍 도착했으나 너무 한가하게 있던 탓에 줄은 이미 길어져 있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씩 앞으로 가는데, 실크 파자마에 털 슬리퍼를 장착하고서 가운을 걸친 여성분이 보였다. 아무리 12시간 비행이라지만 잠옷 차림으로 비행기에 탑승하는 건 좀 오바가 아닐까… 그러나 6시간 후 나는 그분의 탁월한 혜안에 감복하고 잠옷 차림으로 오지 않은 과거의 나를 후회하게 된다. 쨌든 지금의 나는 그저 실크 잠옷의 보태니컬 패턴을 바라보며 이탈리아 최남단 시칠리아의 풍경을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다채롭고 따스한 초록빛 시칠리아 겨울의 풍경을. 나는 표를 받았다.

알리탈리아(Al’italia)는’Wing of Italy’, 즉 ‘이탈리아의 날개’란 뜻이다. 이 날개에 내 몸을 맡기고 유럽대륙의 장화 모양 아뻰니노 반도(Penisola appenninica)에 내려앉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좌석은 날개 부근의 창가였으므로, 내 모든 창밖 시야에 ‘이탈리아의 날개’의 날개가 함께 할 터였다. 2017년 12월 17일 오후 2시. 드디어, 알리탈리아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무리 자도 자도 겨우 한두 시간 흐르고 지루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 천하의 ‘잠만걸’이 잠을 못 자다니‥.!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고 얼굴에 팩도 붙이고 앞 좌석에 붙은 모니터로 테트리스도 하다 결국 비행기 후미의 자유 간식대 근처에 서서 주스와 과자를 까먹으며 국민체조를 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탱탱 부은 다리를 움직이고 있으니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가족여행을 가는 들뜬 아이들, 뒷좌석에 앉은 영어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 자꾸 좌석을 발로 차 댄다며 한국인 승무원에게 불평을 쏟아내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옮겨간 남성, 얌전한 시츄를 넣은 이동장을 메고서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승무원에게 둘러싸인 여성, 나처럼 긴 비행이 지루하고 뻐근하여 나왔지만 체면 때문인지 기웃거리다 슬그머니 내 국민체조를 따라 하던 남성. 나는 그렇게 남은 비행시간을 서서 보냈다. 캐리어 안에 고이 개켜있을 극세사 잠옷을 입은 나를 상상하며‥.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오는 게 아니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기나긴 바람 끝에 착륙의 때가 도래했다. 서쪽 유럽 대륙으로 12시간 비행 끝에 드디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2017년 12월 17일 저녁 8시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공항에 내린 나는 예약해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공항 밖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이 근처인데 표지판이 많아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느 표지판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기에 그 줄 끝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What is this line for?”(이 줄은 뭐죠?)

덥수룩한 수염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그의 대답은

“I don’t know…”(몰라요…)

뭔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영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혼란만 가중된 채 나는 벽 쪽에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Hello, do you know where this bus stop is?” (안녕하세요, 이 버스 정류장 어디 있는지 아세요?)

“Mmmm, I’m new here but… ah…” (음…저 여기 처음 왔는데, 아…)

영국 억양을 가진 그녀는 내게 말하다 말고 일행과 합류해 떠나버렸다. 어쨌든 그녀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시 공항 안에 들어와서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을 붙잡은 뒤에야 로마 중앙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를 늦게 탄 탓인지 뜻밖에도 맨 앞자리에서 로마 밤거리를 드라이브하게 되었다. 나는 로마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내일 저녁 이 공항에 돌아와 또 비행기를 타고 시칠리아섬의 팔코네 보르셀리노(Falcone-Borsellino)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왜 하루를, 일주일도 사나흘도 아닌 하루를 로마에서 보내냐면, 내가 날짜를 잘못 누르고 비행기 표를 예매한 탓에 남자 친구 마르코(Marco♥)보다 하루 일찍 로마에 도착해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로마에서 딱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한담? 출국 전부터 지금 버스에 앉아 달리는 와중에도 고민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는 나를 거대하고 아름다운 로마 중앙역으로 이끌었다.

NCSoft <블레이드&소울>의 린족(기공사)

문제는 로마 중앙역에 도착한 후였다. 숙소에 가기 위해선 중앙역 근처의 전철역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무료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 구글맵을 볼 수 없었다. 와이파이가 있긴 했지만 전화번호 인증을 요구해서 접속할 수 없었다. 중앙역에서 숙소까지는 딱 두 정거장 거리였지만, 노숙자와 취객이 널브러져 있는 한밤의 역전에서 ‘도시락(<블&소>의 한 종족인 ‘린족’의 굴욕적 별명. 귀여운 외모에 걸맞은 최약체라, 힘들게 퀘스트를 완료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타 플레이어에게 습격당해 퀘스트 아이템을 빼앗기는 일이 빈번하여 퀘템을 뺏어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라 불렸다)’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도 없지, 도로명 주소는 어디 쓰여 있는지 보이지도 않지, 같은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웬 남자들 무리가 나보고 ‘Giapponese, Cinese(일본인, 중국인)’라고 쑥덕거리는 걸 듣고 덜컥 겁에 질렸다. 동양인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이목이 쏠리고 입방아에 오르는데, 이 밤중에 커다란 캐리어까지 끌고 으슥한 골목을 돌아다니는 건 “나를 강도질하시오”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용기를 내어 스마트폰으로 축구를 보던 청년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Ciao, Could you help me? Do you know where Lazio station is? (안녕하세요, 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라치오 역이 어딘지 아세요?)”

그는 안절부절못하다 간결하게 대답했다.

“No train. Taxi fine.(열차 끝. 택시 좋.)”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큰길은 스산하기 그지없고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노란 택시들은 쌩 지나가 버렸다. 나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채 경찰이 지키고 있는 중앙역 로비로 돌아왔다. 최후의 수단인 긴급 로밍을 신청할 때였다. 멜로디를 만난 건 바로 이때다.

목에 information이라 적힌 명찰을 걸고 있었지만 딱 봐도 호텔 삐끼인 것이 뻔한 그는 자신을 멜로디(Melody)라 소개했다. 멜로디는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나(주입식 교육 이후 영어 공부를 한 적이 없음) 정도의 수준이어서 문법이 엉망진창이었고 이탈리아식 억양까지 더해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난 예약한 숙소가 있으며 그곳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내 부킹닷컴 예약 프린트를 본 멜로디가 이곳을 안다며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그는 길 안내의 팁을 요구했다. 멜로디는 이 로마 중앙역에서 어슬렁거리며 나 같은 어리버리 관광객에게 들러붙어 호텔을 알선하거나 길 안내 명목으로 팁을 뜯어내며 돈을 버는 것 같았다. 멜로디는 꼬깃꼬깃한 지도를 보여주며 내가 가야 할 숙소의 주소를 짚어주고 주변 경찰에게 아는 척을 하는 등 내 신뢰를 얻으려 했다. 쨌든 로밍을 해서 지도를 보며 걸어갈 생각이었으니, 로밍 값 주고 보디가드(?)도 얻은 셈 치고 길 안내를 부탁했다. 멜로디는 내 캐리어도 대신 끌어주고 싶어 했지만 들고 튈 수도 있다는 의심에 거절했다. 걸어가며 서로 부족한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멜로디는 과연 호텔 호객꾼이 맞았고 로마에서 20년 넘게 살았다고 했다.

“Here is Rome, slow and relax~” (여긴 로마니까 천천히 편하게~)

멜로디는 계속 ‘slow and relax’를 강조하며 내 빠른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난 원래 걸음도 정말 빠르고 이 밤 중에 무섭고 빨리 쉬고 싶어 죽겠는데 뭔 놈의 ‘slow and relax’인가 싶었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Si fueris romae romano vivito more)”고 4세기의 밀라노 사제 성안프로지우스가 그랬다. 공교롭게도 여긴 로마이므로 멜로디를 따라 처언천히 걸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멜로디가 강조한 ‘slow and relax’는 ‘이탈리아의 모든 것은 다 느려 터졌으니 기대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라’를 뜻하는 일종의 경고이자 복선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는 호스텔이 위험한 지역에 있다고 했는데, 따라가 보니 과연 으슥하기 짝이 없었고 길치인 내가 절대 찾아갈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을 뿐더러 멜로디가 아니었으면 도로명 표지판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도로명이 길거리에 표지판으로 세워져 있는 게 아니고 건물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약 15분을 걸어서 정말로 내가 예약한 호스텔 앞에 도작했다. 캐리어를 리프트에 싣고 있자니 멜로디가 어색한 표정을 짓길래 약속한 팁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택시 혹은 로밍한 셈 치고 10유로 정도 주려고 했는데… 손바닥에 20유로가 떡하니 들려있었다. 나와 멜로디 둘 다 놀라서 약 3초간 얼어붙었다. 꺼냈는데 다시 집어넣기도 그렇고 빨리 호스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그냥 냅다 줘버렸더니 멜로디는 엄청난 찬사를 늘어놓으며 내 여행에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주고 떠났다. 역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보통 주차장 삐끼들(주차를 도와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부랑자들)이 팁으로 1유로를 받는다.

곡절 끝에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침대에 누웠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내 옆 침대의 스페인 남자는 내일 새벽 일찍 떠날 예정이라 새벽에 좀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나는 난데없는 혼숙에 충격받을 만도 했지만 오늘치 충격을 멜로디에게 다 줘버리고 온 덕에 머릿속엔 딱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아…내일 뭐 하지…’

ㅡ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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