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방지 위원회

 이듬해 봄. 노망이 자살한지도 어언 1년이 지나 버렸다. 나는 ‘자살 방지 위원회’라는 비영리 상담 및 구호 단체를 설립했다. 더 이상 그림자 없이 자살하는 사람들을 만날 순 없었지만 어떻게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보지 못할 뿐 그들은 사회 어딘가에 계속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한동안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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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모든 순간들을

 나는 카페에서 온 힘을 다해 이영이를 달래 주고 있었다. “미안해, 이영아! 저번에 워낙 급해서 그랬어. 그때 마침 내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본다고 설명한 뒤였잖니.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 줘. 응? 부탁이야.”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그렇게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니? 노래? 춤?” 나는 온갖 아양을 떨었다. “알았어. 대신……. 오빠가 나 버리고 그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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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녀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코트를 입고 게임 숍으로 출근했다. 헉. 저 여자애 이영이랑 무지 닮았다! 키도 작고 갈색 머리에 다리 짧은 것도……. “명백 오빠! 끝나고 놀자며? 웬일이래?” 때마침 소란스럽게 이영이가 등장했다. “이영아, 마침 잘 왔다. 저기 서 있는 여자애 봐봐. 쟤 너랑 엄청 닮았어. 생긴 게 완전 판박이라니까!” “뭐라고? 말도 안 돼. 내가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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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점프

 빠앙! 엄청난 속도로 지하철이 눈앞을 지나갔다. 보라와 나는 술에 취한 채 나란히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진짜? 알았어. 내가 내일 당장 대주랑 병원으로 갈게! 아, 안정을 취해야 되니까 나중에 천천히 오라고? 알았어. 그러지 뭐.” 나는 전화를 끊고 보라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보라야,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던 친구 있잖아.” “호태? 맞나? 중태에 빠졌다던 그 친구.” “오잉, 이름까지 기억하는구나. 그놈이 드디어 의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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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비행기

 사고가 났다. 사거리 한복판에서 트럭과 부딪친 바이크는 단숨에 전복되었고, 호태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의식이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한걸음에 달려온 지혜는 이내 휴학 중이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지혜는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휴학 이후 줄곧 근무해 온 유치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죄송해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처럼 이제 풀타임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없을 거 같아요. 아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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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터지게 힘껏 달려가

 나는 이영이와 아쿠아리움에 갔다. 며칠 내내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해 버렸다. “오빠, 아이스크림 먹을래?” 이영이는 로비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켰다. “응.” “뭐가 또 그렇게 뾰로통해!”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날름날름 먹으며 아쿠아리움 관 안으로 입장했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사방을 맴돌았다. “우와, 대박! 물고기들 짱 많다! 이거 봐, 신기하게 생긴 거도 있어. 저건 진짜 웃기게 생겼다. 그치?” “이영아.” “응?” “넌 내가 그렇게 좋아?” 이영이는 만화 캐릭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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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문제는 없다

 무더운 여름, 우리는 바이크를 몰고 서해로 피서를 왔다. 호태는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야, 그래도 서울 벗어나니까 살맛 나지 않아?” “아니, 전혀. 이거 몰고 오다 도로에서 쩌 죽을 뻔했어. 그래서 내가 편하게 기차 타고 오자고 했잖아. 보통 먼 거리가 아니라니까.” 대주는 죽는소리를 했다. “아니, 근데 아까 해수욕장 초입에 있던 공장 봤어?” “봤어. 건물이 완전 큰데다가 거무튀튀한 게 무슨 악의 소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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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사장에게 땡땡이, 손님 있는 상태에서 만화 보기, 먹을 거 몰래 꺼내 먹기 등의 만행을 들켜 편의점에서 잘리고 말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일어난 모든 일들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젠장. 역시 직업이 없으면 불안하다! 노트북을 열고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국제전자센터 내 게임 숍 알바. 통근 거리가 꽤 있었지만 지하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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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흩날려

 우리는 식당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보라야, 준비됐어?” “응. 가자. 잠깐만, 주방에 불 안 껐다. 그래서 오늘 어디 갈 건데?” “어디 가고 싶은데?” “어쭈, 준비도 안 해놨단 말이지! 그럼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자.” 또 술이냐! 우리는 바이크를 식당 앞에 내버려 둔 채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보라는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더 털털해지곤 했다. 매력적이었다. “취하니까 너무 좋은 거 있지. 명백아, 나 있잖아. 취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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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드디어 프리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구나.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이럴 수밖에 없겠지. “9800원입니다. 할인이나 적립 카드 있으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삑삑. 간단한 일이었지만 무척이나 심심한 일이었다. 때로는 너무 심심해서 좀이 쑤실 정도였다. 급기야 나는 손님이 없을 때 계산대 밑에서 몰래 만화책을 봤다. 가끔은 손님이 있을 때도 봤다. 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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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살고 싶습니다

 다행히 ‘새벽’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보라야.”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 명백아,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무슨 소리야. 연락했는데 네가 다 씹었잖아.” “답장했는데…….” “응, 했지. 이틀 뒤에.” “미안. 내가 원래 그런 거에 둔감하잖아.” 보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곁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또 저놈이구먼. 돈도 안 내고 먹는 놈.” “아이, 사장님. 그게 아니라 아무리 주려고 해도 보라가 돈을 안 받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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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명백 오빠!” 헐. 이영이였다. “으악, 네가 왜 여기에?” “나랑 놀자. 데이트하자, 데이트!” 나는 과장되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너 나 철창 들어가는 꼴 보고 싶니? 너 미성년자잖아!” “엥? 겁쟁이!” 잠시 후. “근데 이영아, 너 아까부터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니?” “오빠가 좋아서. 몰랐어? 나 오빠한테 완전 빠졌잖아. 아, 그리고 내가 톡 보내면 답장 좀 빨리해. 너무 느려.” 헉. 이거 이러다 조만간 수갑 차겠구나. “그래. 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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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하필이면 내가 그날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어서 보라를 만나게 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이 이렇게 돼 버리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잖아. 혹시 나한테 노망에 대한 죄책감이 있나? 보라를 구한 게 운명적이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단지 기분 탓일까? 끼익! 헉. 뭐야? 저 여자애 혹시 죽으려고 하는 거 아냐?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수족관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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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도자기

 “아이, 세트 메뉴 주문한 게 언젠데 아직도 안 나와!” 대주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 점원에게 짜증을 냈다.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나올 거예요.” 나는 녀석을 뜯어말렸다. “너 이러다 성격 다 버리겠다. 이미 버렸지만 더 버리겠어.” “그러게. 근데 나 오늘 점심도 못 먹고 일했단 말이야. 배고파 죽겠어.” “저분들도 점심 못 먹고 일했을 수도 있잖아. 아니, 아침도 못 먹고 일했으면 어떡할래?” “미안하다.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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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말을 할 줄 아는

 “야, 대박 사건! 나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내 호기로운 외침에 호태는 바이크에서 내리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얼마 전에 얘기한 애 있잖아. 호수 저쪽에 빠졌던. 나 그 여자 구하다가 감기 걸려서 아직도 몸이 으슬으슬하다니까.” 대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뻐?” “예쁘냐고? 예쁜 정도가 아냐. 완전 여신이라니까!” “여신이라고? 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아냐, 너희가 직접 한번 봐야 돼. 눈 마주치고 있으면 심장이 터질 거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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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하고도 364일

 노망 사건으로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고 얼마 있지 않아 고향인 제주로 귀농을 했다. “괜찮아. 아무쪼록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서울에서 너 할 거나 해. 마음도 잘 추스르고. 적금 들어 놓은 거도 깼으니까 매달 조금씩 부칠게. 어차피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봐 드려야 할 때가 됐잖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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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자살하지 않을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을 백수로 지내던 그때,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호태, 대주와 함께 바이크를 탔다. 우리는 한참을 신나게 달리다 호숫가에 멈춰 섰다. “잠깐만. 친구 놈이 엽사를 보냈어. 답장해 줘야지.” 나는 최대한 얼굴을 구겨 엽사를 찍었다. 대주가 눈을 흘겼다. “지금 그런 거 할 때냐. 빨리 취직해야지.” 호태가 끼어들었다. “인마, 넌 대학부터 군대, 회사까지 탄탄대로였겠지만 우린 아냐.”  대주와 나는 피식거렸다. 대주는 화제를 돌렸다. “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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