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하고도 364일

 노망 사건으로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고 얼마 있지 않아 고향인 제주로 귀농을 했다.
 “괜찮아. 아무쪼록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서울에서 너 할 거나 해. 마음도 잘 추스르고. 적금 들어 놓은 거도 깼으니까 매달 조금씩 부칠게. 어차피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봐 드려야 할 때가 됐잖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텅 빈 집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이 이렇게 넓었던가. 젠장.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와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무작정 호수를 향해 달렸다. 팡! 맙소사. 난데없이 타이어가 터져 버렸다. 바이크는 퍼진 타이어를 달고 너풀거리며 나아갔다.
 “보통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이런 장면 되게 멋있던데. 슬픔을 뒤로하고 달리는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이랄까? 현실은 실제 눈물이구먼.”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타이어는 한층 더 너풀거렸다. 결국 카센터까지 끌고 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호숫가에는 역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바이크에 걸터앉아 호수에 비친 노을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급작스럽게 세상 모든 괴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거만 같았다. 어둠 속을 비추던 잔물결이 눈을 간지럽혔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릴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노망의 말처럼 정말 모든 게 끝일까?
 그때였다. 풍덩!
 “어, 어? 사람이 뛰어내렸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
 “어머, 어떡해! 큰일 났네!”
 사람들의 다급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호수 반대편을 향해 재빨리 바이크를 몰았다. 호수에는 한 여자가 빠져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나는 지체하지 않고 뛰어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가녀린 여자였다.

 “댁은 상관없잖아.”
 “오잉?”
 어째서 초면에 반말인 거냐. 아니, 일단 그게 구해준 사람한테 하는 첫마디 맞아?
 “보라야.”
 “네?”
 “보라라고. 내 이름.”
 “아, 그렇구나. 전 명백이라고 해요. 보라? 되게 예쁜 이름이네요.”
 “개수작 부리지 마.”
 “수작도 아니고 개수작? 그리고 아까부터 왜 자꾸 초면에 반말이에요?”
 “너도 반말해.”
 “오잉?”
 “억울하면 너도 반말하라고.”
 “너 몇 살이냐!”
 “비밀!”
 “갑자기 귀여운 척이냐!”
 “솔직히 귀엽지?”
 “뭐……. 쉽게 부정은 못하지 않지는 않을까 싶진 않다가도…….”
 “어휴, 너도 똑같구나.”
 “오잉?”
 “아니, 어쩌면 좀 더 바보네. 이 바보야.”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입을 크게 벌린 채 이번에는 ‘오잉’도 말하지 못했다. 보라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배 안 고파? 뭐 좀 안 먹을래?”
 헐. 말렸다. 이 여자 뭔데 이렇게까지 기가 센 거지? 한 서린 여자의 음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혹시 귀신인가? 설마 내가 이미 죽어 있던 시체를 건져낸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런 생각하지 말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무섭잖아. 무엇보다 귀신이 이렇게 예쁠 리 없어.
 ‘새벽’이라는 이름의 식당. 그녀는 손수 식당 문을 열었다.
 “너 여기 사장이야?”
 “아니, 요리사야. 사장은 가끔 나와.”
 “진작 말하지. 처음에는 그냥 손님인 줄 알았잖아.”
 보라는 열린 주방에 들어가 직접 요리를 했다. 지글지글. 연어 스테이크가 식탁에 놓여졌다. 너무 맛있잖아! 먹어본 적도 없지만 왠지 미슐랭 3스타의 맛이랄까! 마주 앉은 그녀는 가끔, 아주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미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는 평상시의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자 보라는 의외로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2월 29일.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4년에 한 번씩 악몽이 떠오르는 날. 나 아홉 살 때,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이었던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했거든. 며칠 동안 밤새 끙끙 앓다 겨우 새엄마한테 말했는데, 그때 처음 알았어. 세상은 자기 일엔 관대하고 남 일에는 한없이 냉정하다는 걸.”
 ‘썅년아! 네가 막 짧은 옷 입고 돌아다녔잖아! 마냥 앤 줄로만 알았는데 어린년이 벌써부터 창녀처럼 발랑 까져 가지고! 이리 와. 넌 좀 맞아야겠다. 빗자루 어디 있어?’
 ‘엄마, 잘못했어요! 아파요! 살려주세요!’
 “봤어? 내 손목 위의 상처들. 4년 전에도, 또 그 4년 전에도 이날만 되면 병원에 실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어. 오늘은 하루 종일 별일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구나 싶었는데. 손님도 없고 해서 식당 문 닫고 잠깐 호숫가 좀 걷다 가려고 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신물이 나는 바람에…….”

 나는 한층 더 유약해진 보라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보란 듯이 식탁을 탁 치며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두 시 땡! 지금부터 3월 1일이다! 저 뒤에 있는 벽시계를 봐. 내 말 맞지?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기쁘지 않아? 오늘부터 3년하고도 364일 동안은 울지 않아도 되잖아.”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보라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 더 큰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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