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예능 속 폭력과 웃음의 관계 연구 : (ダウンタウンの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 SP를 중심으로

예술사 학위논문
지도교수 남 수 영

일본 예능 속 폭력과 웃음의 관계 연구
: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ダウンタウンの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 SP를 중심으로

2017년 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과정
영상원 영상이론과 기획전공
여 운 규

일본 예능 속 폭력과 웃음의 관계 연구
: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ダウンタウンの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 SP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남 수 영

이 논문을 예술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6년  1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과정
영상원 영상이론과 기획전공
여 운 규

여 운 규 의 예술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2017년    1월   일

심사위원장                     (印)
위      원                     (印)
위      원                     (印)
위      원                     (印)

Ⅰ. 서론   1

Ⅱ. 본론   2

1.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

1) 프로그램 개요   2
2) 폭력성과 전위성   4
3)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5

2. 유형화된 예능 폭력의 종류와 웃음 코드

1) 물리적 폭력   7
2) 성적 폭력   7
3) 더러움에 관한 폭력   7
4) 약자에 대한 폭력   8
5) 심리적 압박에 관한 폭력   8

3. 예술과 사회

1) 극단으로부터의 쾌락   11
2) 약자에 대한 혐오   13
3) 상업적 성공의 문화사회적 의미   17

Ⅲ. 결론   22

참고문헌   24
선정성의 구체적 사례   25

Ⅰ. 서론

흔히들 일본이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서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래서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있어 앞으로 예견되는 현상들에 관해 상대적으로 먼저 경험했던 일본을 참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부동산 버블 붕괴 문제라든지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 문제가 그러하다. 일종의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통용되는, 용인되는 미디어의 표현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데, 대략 10년 전 일본이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이는 본 논문이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표현 수위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선정적 예능 프로그램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가늠하고자 하는 배경이다.
예능 프로그램 표현 수위의 개방화는 표현의 자유 혹은 다양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종 사회문제들을 양산하는 것도 분명하다. 매체는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매체는 정서를 만들고 여론을 만든다. 군중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창출하게 된다. 급속한 대중적 전파력, 파급력, 인기 등을 기반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과도한 전위성과 폭력성, 선정성을 갖게 된다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예견할 만하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의 폭력성은 사회적으로도 유해할 뿐 아니라 상업 프로그램으로서 한계로 작동하기도 한다. 지나친 표현 수위의 개방화가 흥미의 반감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주 목적은 어디까지나 재미에 있는데, 폭력이 가지고 있는 반쾌락적 특성은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발생시킬 수 있다.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쾌감을 자아내는 선정적 프로그램들은 공중파 매체에서는 방송법상의 제재를 받기도 하며, 그보다 좀 더 자유로운 케이블이나 인터넷 방송과 같은 비주류 매체를 찾게 된다.
일본의 NTV에서 현재까지 27년 동안 방송되고 있는 장수 예능 프로그램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ダウンタウンの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는 위험한 수준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해당 프로그램의 특집,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는 그에 대한 가장 극단적 예다. 그러나 2012년 12월 6일 요시모토 뉴스센터의 기사는 이 프로그램의 SP 시리즈, 총 18편의 DVD 누적 판매 합계가 약 400만 부를 돌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랫동안 마니아층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선정성과 폭력성을 분석, 설명하고, 이 프로그램을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 방송의 경계로 규정하고자 한다. 결국 이 논문은 방송 매체의 다양화에 따른 프로그램 분포와 선정성이 배가되는 양상에 대한 보고서의 역할도 맡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두 가지 접근법에 따른 연구를 목표한다. 우선 문화연구의 측면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또 인기를 끌게 된 배경으로 일본만의 독특한 집단적 특성과의 연관성을 살펴볼 것이다. 일본의 경우 공중파 주요 채널에서 이 프로그램이 여과 없이 수용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코미디는 케이블이나 인터넷 방송에서나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물론 양국의 문화 정서적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디어연구의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본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비주류 매체가 주류 매체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비주류 매체의 특정 프로그램 및 콘텐츠는 매체의 존립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을 유지 또는 성장시키기 위해 특별히 부각되곤 한다. 그 효용에 대해서는 양가적 평가가 가능한데, 예를 들어 케이블과 인터넷 방송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비주류, 소규모 방송은 다양한 계층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정보의 원천을 분산시켜 정치적 담론의 토양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퍼포먼스나 극단적으로 상업화된 코미디의 분출구가 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인식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의 특집 시리즈 분석을 통해 프로그램의 전위적 특성이 주류사회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집단 문화의 억압적 측면을 해소시켜준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폭력들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폭력의 종류’를 ‘유형화’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오늘날 공중파를 피해 양산되는 폭력적 방송들의 폐해를 재조명해 볼 것이다. 폭력성, 선정성의 경향은 매체의 다변화와 함께 더욱 확대되는 추세에 있으므로, 우리는 일본의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를 그저 새롭고 실험적인 요소만으로 용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Ⅱ. 본론

1.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

1) 프로그램 개요

분석에 앞서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먼저 파악하자면, 해당 프로그램은 1989년 10월 3일 처음 방영되었다. 현재 일요일 23시 25분~23시 55분에 방송되고 있다. 관서 방송에서 방영되다가 1991년 10월경 NTV 네트워크의 늦은 밤 프로그램으로 옮겨 <쇼게키 덴에이바코>란 이름으로 가장 오랫동안 전파를 타기도 했다. 프로그램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구획되어 있다. 평상시 매주 다른 주제를 선정해 여러 가지 도전이나 퀴즈 따위를 하는 형식과 일정 기간마다 『절대로 웃지 않는 시리즈』 등의 특집을 편성하는 것이다. 시청자 측은 프로그램 기획 자체부터 자극적인 정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특집의 경우 자극성과 폭력성이 평상시보다 유달리 강조되어 있지만, 평소 방영분 내에도 작지만 결코 간과할 수만은 없는 비근한 문제점들이 있어온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 전체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쉽게 전복될 수 없다.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ガキの使いやあらへんで)라는 말은 오사카의 사투리로 ‘애들 취급하기 없기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프로그램의 제목이 오사카 사투리로 정해진 데는 프로그램의 주축 멤버 ‘다운타운’의 출신 지역이 오사카라는 점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다운타운은 마츠모토 히토시(松本 人志)와 하마다 마사토시(浜田 雅功)로 구성된 개그콤비로, 일본 연예계, 방송가의 판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일본 텔레비전 시대의 코미디극을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실제로 1980년대 초반에 코미디극 붐이 일어 수십 종의 만담 코미디극이 생겨나 전 일본에 걸쳐 관심이 집중됐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다. 관서지방의 중심인 오사카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상업도시였지만 관청을 비롯한 모든 것이 도쿄에 집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오사카 사람들은 도쿄와 마주보며 항상 2위를 하는 처지를 원망스럽게 생각해왔고, 이는 곧 만담이 동경의 권위를 비꼬아 풍자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장호 옮김(마크 실링), 『일본대중문화 여기까지 알면 된다』(서울: 초록배매직스, 1999), 153쪽.

오사카에서 도쿄로, 작은 무대에서 큰 무대로 무대를 옮긴 다운타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두 사람은 함께 TV 황금시간대의 정보오락 쇼를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는데 하마다는 1995년에 베스트셀러가 된 《읽어라!》란 제목의 코믹한 수기 모음집을 써서 80만 권을 판매했고, 1994년 마츠모토는 《유서》를 집필해 400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위의 책, 153-154쪽.

그러다 둘은 운명적으로 전설적인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게 되는데 그 프로그램이 바로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다. 프로그램 초창기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식이다. 마츠모토가 콘크리트 안전장치 없이 주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신중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동안, 하마다는 천천히 실제 주차장에 만들어진 아파트 세트의 벽을 자동차로 사정없이 밀어버린다. 이때 건물 안 치과 시술용 의자에서 간통하던 간호사와 치과의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피신을 하고, 하마다는 차를 세우고 얌전히 서 있는 곳으로 멀쩡히 돌아와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든다. 이것은 하마다의 예측할 수 없는 발상으로 대본에 있지도 않은 부분이다. 한편 마츠모토는 질린 표정을 짓고 급기야는 자동차를 불태워 폭파시켜버린다. 모든 상황이 꼭 실제처럼 벌어지는 코미디인 것이다. 위의 책, 155-156쪽.
물론 초창기만 하더라도 그다지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쇼를 시작했을 때만해도 시청률은 바닥을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는 방송국에 온 방청객들도 손을 가만히 두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위의 책, 157쪽.
익숙한 방식의 기존 코미디와는 달랐기 때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프로그램이 오늘날처럼 거대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견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2) 폭력성과 전위성

이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폭력성이 점점 강해지고 관객이 그와 같은 시스템을 이해하고 호응하게 되면서부터다. 이 프로그램의 특집 시리즈의 폭력성은 주로 가혹한 벌칙에서 나온다. 강도 높은 벌칙을 수행하며 고통을 주고받는 과정으로 승부수를 던지다보니 회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점점 더 잔악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본성이 존재한다. 자극이라는 건 이전과 비교해봤을 때 상대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전제로 한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경험한 후라면 그 자극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신선한 자극으로 수용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자극의 정도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험적, 생득적 쾌감을 대주제로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선정성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당 프로그램 시리즈에 관해 폭력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 힌트를 웃음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교육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성으로부터 공격적이고 야생적인 부분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사회가 합의한 규칙으로부터 다수를 지켜내기 위해 장기간 구축되어온 그 형질의 불쾌가 호전적이고 극단적인 야생의 상태로 회귀하게 되면서 강도 높은 웃음이 제공하는 쾌감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웃음의 강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 온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진지하지 않은 본성이 그만큼 많이 은폐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낙차도 큰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웃음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한 바 있다. 진지함의 본질은 개념 또는 생각과 직관 또는 현실이 완벽하게 합치 혹은 일치한다는 의식으로, 진지한 사람은 자기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사물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주 진지하다가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 빈번하며, 별 것 아닌 일로도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진지한 사람이 믿고 있는 그 일치성은 사물이 완벽하게 보일수록 예기치 않게 드러나는 사소한 불일치에 의해 쉽게 뒤집힐 수 있다. 농담은 의도적으로 웃기려 하는 것이다. 즉 농담은 다른 사람의 개념들과 현실 중 하나의 위치를 이동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한다. 반면 진지함은 그 둘이 서로 정확히 대응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농담이 진지성 뒤에 숨어들면 반어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견해와는 정반대인 다른 사람의 견해를 진지하게 논하는 척, 의견을 같이 하는 척하다가 결국 결론에 가서는 상대가 우리의 진의와 자기 견해의 타당성에 대해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최흥주 옮김(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서울: 시아, 2009), 317-318쪽.
웃음은 이런 경우에 성립한다.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의 인기도 기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 너머에는 프로그램을 ‘전위적’, ‘진보적’ 혹은 ‘실험적’ 코미디로 성립시키는 원리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현대미술과 유사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다원화된, 추상적이고 난해한 소재로부터 코미디의 주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하는 사고에서부터 선정성의 정당화가 시작된다.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웃을 수 없는 코미디, 기존의 텔레비전 코미디와는 차별성이 있는 무언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시도가 단기적 혹은 단편적으로 이뤄진다면 큰 효과를 보기 어렵겠지만, 일관된 지속성을 가지고 연재의 형식으로 방영과 발매를 이어나간다면 머지않아 대중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을 제공하게 된다.
본 연구자는 이 프로그램의 에피소드들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면서 양적이고 질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시리즈를 매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가혹해지고 엽기적이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시간 순으로 표현의 수위가 개방화된 것이다. 하나를 허용해주면 또 그만큼의 수용적, 의식적, 인식적 보편화가 이루어지고 또 하나를 허용해주면 또 그만큼의 보편화가 일어난 탓이다. 실제로 처음 이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고 DVD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시기의 충격은 찬반과 호불호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런 혼돈의 시기도 잠시, 꾸준히 연재되면서 점차 내용의 문제점, 선정성에 관한 인식은 프로그램의 인지도와 함께 보편화되어갔다. 인지도와 선정성에 관한 인식이 보편화되어갈 무렵, 불쾌는 상당 부분 감소하게 되었다. 과도하게 자극적이라는 정서적 불편함이 충격의 영역에서 보편의 영역으로 내려오면서 불쾌가 줄어든 것이다. 그때 생겨난 공백을 쾌가 메우게 되는데, 그 쾌는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적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쾌로 제작진이나 출연진이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기제에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를 떠나, 그들이 지속적으로 이런 종류의 코미디를 하고 있고 그 안에 일종의 ‘괴기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형성된다. 그 쾌의 발견은 ‘현대예술’이 갖는 설명될 듯 설명되지 않는, 하지만 그 상태 자체로서 의의를 가지는 진보성과 관련한다.

3)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문제는 프로그램 특성상 수용적 측면에 있어 계속해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웃음을 갈구하는 현상이 반복되다보니 개별적 코미디 장치가 갖는 일회성의 웃음을 넘어 하나의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코미디’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예술과도 같은 코미디’라고 하는 인지적 틀을 규정하여 시청자들을 점차 폭력에 둔감하고 무감각한 무규범 상태로 만드는 현상을  배태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성적 폭력’의 경우 성기와 항문 등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카메라 앞에 노출되어 위화감 조성이란 명목으로 비판을 받거나 코미디로 성립되지 않는, 즉 자칫하면 웃기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기와 항문 등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주지할 필요성이 있다. 코미디는 무엇이든지 간에 결과를 보여줘야 코미디로서 성립이 된다. 과정이 선결되어야 하고 그 과정의 끝에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일정한 형식과 규격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그 결과가 적힌 카드를 단기간 내에 뒤집으면 뒤집을수록 웃음에 효과가 크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 엄연한 방송이기 때문에 성기나 항문 따위를 직접적 결과로 드러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웃음을 탄생시키는 다수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결과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코미디로 성립된다. 모자이크 처리로 이면을 자극적으로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아적 심리에 가까운데, 공공장소에서 특정 인물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인식에서 멀쩡한 사람,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인물을 단체로 놀리고 싶은, ‘알나리깔나리’를 하고 싶은 유아적 심리가 담겨 있다. 혼자서는 마음껏 웃고 놀릴 용기가 없다. 잘 모르는 타인, 용기의 부재, 소외감 등이 불쾌로 작용하기 때문에 웃음이 반감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특정 인물을 집단으로 목격했을 경우 내 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건의 실황을 중계하고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은 이질감의 불쾌를 집단적 웃음의 쾌로 바꿔내기 충분하다. 철없는 아동의 심리인 것이다. 철없는 아동들은 동네 꼬마를 바보라고 놀리면서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농담과 그 농담을 발화할 때 덧씌워져 나오는 음악적 선율에 스스로가 쾌감을 얻어 웃음을 터뜨린다. 프로그램 내에서 나체가 된 인물에게 단체로 공격과 야유를 퍼붓고 그 인물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단계에서 그 결과의 실체, 즉 성기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신체의 노출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적 영역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노출의 개념과 수치심, 위화감 등 불쾌의 연결고리 안에 숨겨진 집단의 허위의식을 노출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관람자의 웃음은 의도치 않게 규범에 대한 저항에 동조하는 층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의 파격이 전위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보나 실험 혹은 전위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진보적 차원의 표현의 자유보다 보편적 차원의 정서 보호가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시청자는 보편타당의 가치 속에서 안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실제로 시리즈의 웃음 코드를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폭력의 구조와 닮아있는지 알 수 있다. 웃음코드의 유형화가 폭력의 유형화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2. 유형화된 예능 폭력의 종류와 웃음 코드

1) 물리적 폭력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드러나는, 소위 ‘예능 폭력’은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먼저 ‘물리적 폭력’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물리적 폭력은 그야말로 가장 시각적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피상적 폭력에 해당한다. 일종의 체벌 같은 것이다. 매를 맞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규율에 복종하는 것이다. 몽둥이를 들고 오는 사람 앞에 스스로 맞기 좋게 상체를 구부리거나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대는 것이다. 특별한 반항이 없다는 건 프로그램 진행을 지속해나가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목표의 성취를 위해 응당 감수해야할 몫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것이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훈도시 차림의 사내들의 차력을 이용한 코미디가 대표적인 예시로, 성기를 가격당하고, 화상을 입고, 감전을 당하고, 숨 막히기를 당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2) 성적 폭력

시리즈 내에서 ‘성적 폭력’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출연자들이 가슴이나 성기, 항문 등 치부나 급소를 노출하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제아무리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전파를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선정성은 생각보다 별반 줄어들지 않는다. 모자이크라는 기술의 활용도나 사용처, 모양새 자체가 위화감을 조성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는 해당 장면을 합법적으로 방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공사로서의 기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모자이크 아래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안에 든 것을 무한정 상상하게 만드는 동력이 있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의 실체가 가려져 있지 않은 것의 실체보다 더 궁금한 것이다. 모자이크 장면을 보여주면서 박장대소를 유도한다는 건 성적 모멸감을 극대화하는 사디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코미디 포르노’ 혹은 ‘예능 포르노’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식은 선정성의 근원적 의미와 가장 유사한 형태를 띠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주지할 필요성이 있다.

3) 더러움에 관한 폭력

시리즈에서 한 사람의 사지를 묶어놓고 얼굴에 생식기 부근과 항문 부근을 갖다 대는 장면은 ‘더러움에 관한 폭력’으로 분류된다. 몸에 면을 쏟는다든가 국물을 쏟는다든가 하는 장면들도 그러한 것들이다. 하지만 보다 극렬한 예제가 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제어하고 그 앞에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이 등장해 항문에 공기와 흰 가루를 주입한 뒤 괄약근에 힘을 주어 무방비 상태가 되어있는 상대의 얼굴에 가루를 분사하는 장면이다. 단순히 주머니에 담겨 있던 공기와 흰 가루를 사람 얼굴에 뿌렸다면 더러움을 느끼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체면 등을 담당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받아냈다는 심리적 모멸감은 차지하더라도, 타인의 항문 속에 담겨 있던 것을 호흡기로 받아내는 비위생의 문제가 대두된다.

4) 약자에 대한 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은 실상 모든 폭력의 기저에 위치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시리즈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노인이라는 이유로 웃음거리로 만드는 경향이 짙은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타 긍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늙고 약하고 못생겼다는 외견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걸핏하면 등장하는 못생긴 남성, 못생긴 여성, 게이, 레즈비언, 외국인 등의 인물 기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사회생활에서 그들을 차별하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남의 눈치를 보느라, 체면을 차리느라 차마 욕을 하지 못하고 흉을 보지 못한 억압의 발로로, 대리만족의 쾌감으로, 카타르시스로 얼마나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심리적 압박에 관한 폭력

‘심리적 압박에 관한 폭력’은 양심에 가해지는 강압성과 관련이 있다. 물리적 폭력이 곧 자행될 것만 같은 시기에 시작돼 실제로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과정에 극대화되었다가 폭력이 끝난 다음 서서히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 어떤 인물을 괴롭힐 것만 같은 순간에 그를 지켜보는 두근거림을 간직하고 있다가 실제로 그 사람을 괴롭힐 때, 그를 보며 피해자의 주변 인물들이 웃음을 터뜨릴 때, 폭력이 끝나고 난 뒤 피해자가 홀로 남겨졌을 때 남아 있는, 잔여분의 웃음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심리적 압박에 관한 폭력’은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 일종의 집단적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로부터 오는 양심적 불편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위치한 시청자 집단이 아무런 행동에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가해자의 알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방관자 집단으로 동화되는 현상이다. 실제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의 멤버들과 그를 지켜보는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리게 되면 민감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시청자들은 강도 높은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상기 형식으로 유형화된 예능 폭력의 종류가 어떻게 웃음 코드와 연결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선관은 자신의 논문에서 코미디가 장르적으로 웃음을 유발해내는 양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웃음의 첫 번째 기제는 우월론(Superiority theory)이다. 이 우월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언급되어지고, 이어 홉스가 발전시킨 이론이다. 코미디를 즐기는 사람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인물보다 우월감을 느낄 때 웃음이 발생한다는 이론으로서, 홉스는 희극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관찰할 때 나타나는 우월감에서 웃고 즐거워한다는 현상으로 해당 이론을 설명한다.
웃음의 두 번째 기제로는 대조론(Contrast theory)을 들 수 있다. 대조론은 18세기 이후 독일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된 이론으로, 기대적인 상황과 현실 사이의 불합리한 대조에서 웃음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칸트(Kant)는 “웃음은 긴장된 상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갑자기 변하는데서 오는 감동”이라고 한다(김진성 역, 1993, p.54). 또한 립스(Lipps)는 대조의 생각에서 어떤 큰 것과 작은 것을 서로 대조시킬 때 웃음이 유발된다고 한다.
셋째로 절충론(Combination explanation)이다. 절충론은 우월감과 대조의 부조화라는 인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우월감과 대조론을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절충론이라고 하기보다는 “웃음의 종합론”, “웃음의 일반론”이라 부르는 것이 차라리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김선관,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웃음’ 생성에 관한 연구 : KBS-2TV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 분석을 중심으로』 (서울: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11-12쪽.
이외에도 웃음에 대해 좀 더 세분화해서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기대(예상, expectation)는 자기가 기대했던 상황으로 전개됐을 때나 반대로 예상과는 다른 상황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발생하는 웃음으로 대조론의 매커니즘에 의한 웃음이라 하겠다. 역전(전도, inversion) 역시 대조론에 입각한 웃음유발기법으로, 예측된 결과와는 전혀 맞지 않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 웃음을 야기하는 것이다. 부조화, 불균형(incongruity)은 조화스럽지 못하거나 균형이 어긋난 상태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대조론의 매커니즘을 이용해 관객에게 기대를 걸게 해놓고 그것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웃음유발이다. 위의 책, 15쪽.
반복(repetition)은 특정 몸동작이나 언어적 소개를 연속하여 사용하는 표현양식이다. 위의 책, 15-16쪽.
연쇄반응(連鎖反應: la boule de neige)은 반복처럼 되풀이해 웃음을 유발하는 기법으로, 사건의 실마리가 종결되지 않고 연속하여 다른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커다란 상황으로 변화하거나 계속 연쇄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모방(imitation)은 특정 인물이나 사건의 특징을 강조하여 유사성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두 요소 사이의 유사성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은유적 의미작용을 한다. 위의 책, 16쪽.
과장(exaggeration)은 현상을 진실된 실체 그 이상으로 나타내어 인간의 어리석음, 부조리, 과욕의 성격을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성격의 과장이나 상황의 과장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우매(fool, stupidity, foolishness)는 등장인물이나 바보 같은 행위나 언사를 통하여 시청자의 우월감을 만족시키는 표현양식으로 웃음유발의 기법 중에서 시청자에게 가장 많은 만족감을 준다. 착오, 실수(error)는 현상에 대한 시행착오나 실수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표현양식이다. 폭로, 풍자(disclosure)는 전제되어진 비밀이 폭로될 경우 곤란한 궁지에 몰리게 될 상황을 설정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위의 책, 17쪽.

보다 언어적 형질에 국한된 웃음의 형태로 접근하자면, 전위의 농담이라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전위의 농담은 위치가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 간의 높낮이가 순식간에 전복됨으로 인해 웃음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발화와 수화의 태도 변화와 관련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는데, 한 식객이 오스텐데로 여행할 수 있도록 원조해달라고 부유한 공작에게 요청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의사들이 건강 회복을 위해 해수욕을 권했다는 것이다. “좋습니다. 어느 정도 도움을 드리죠.” 그 부자 공작이 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오스텐데로 가야만 합니까?” “공작님, 내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어느 것도 비싸지 않아요.” 그는 훈계조로 대답한다. 분명 옳은 입장이다. 그러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대답으로서는 옳지 않다. 이 대답은 부유한 남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식객은 그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쓰게 될 돈이 마치 자기 자신의 돈인 양, 돈과 건강이 동일한 사람에 속하는 것인 양 행동한다. 임인주 옮김(지그문트 프로이트),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 (파주: 열린책들, 2004a), 71-72쪽.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대탈옥 24시>(2014년)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전위를 확인할 수 있다. VTR 시청 전에 나누는 오프닝 토크에서 하마다가 “9년 연속 니혼테레비는 이 방송으로 해를 넘긴다.”고 말을 하자, 마츠모토는 “올해로 가락이 딱 맞으니까 이걸 마지막으로 다시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이 선언에 방청객들은 놀라움의 표시로 다같이 “에-”를 외치게 되고, 공손하게 말을 하던 마츠모토는 “너희들이 해봐!”라고 버럭 화를 낸다.
이선웅 역시 웃음이 탄생하는 농담의 기술적인 측면을 언어적 웃음 표현의 특성과 유형을 통해 정리한 바 있다. 어떤 언어 표현이든 형식과 내용, 두 면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언어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각기 웃음을 유발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는 분류 기분의 배타성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구현 방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결국 우리가 분류하려는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웃음 유발 표현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가. 언어 형식에 근거한 것
A. 방심형
B. 예측 불허형
C. 예측 오류형

나. 언어 내용에 근거한 것
A. 방심형
B. 예측 불허형
C. 예측 오류형 이선웅,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머 분석』 (대구: 한국어문학회, 2005), 11쪽.

이것은 결국 웃음의 본질이 폭력과 연관된다는 것을 일정 부분 암시한다. 우열을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열을 나누는 방식이 우월감이든 불합리한 대조든, 예측을 불허하는 방식이든 오류를 발생시키는 방식이든, 무언가를 작위적으로 나누고 통제하는 형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스파이>(2010년)에서 스트리퍼로 분한 한 연기자는 버스 의자에 앉아있던 중학생 역할의 연기자 앞에서 옷을 벗어제낀다. 스트리퍼는 극화된 몸짓으로 옷을 벗어제끼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모방, 과장, 우매 등을 통하여 웃음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지만, 동시에 중학생 즉, 미성년자를 보호의 대상이라고 하는 통념으로부터 유리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웃음의 구조는 폭력의 구조와 일치한다.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유혹, 유린하는 성적 폭력과 약자에 대한 폭력을 웃음의 주요 골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획의 구조적 문제에 초점을 맞춰 외설 혹은 외설 너머의 혐오, 혐오적 표현에 관해 탐구해보고자 한다.

3. 예술과 사회

1) 극단으로부터의 쾌락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는 표현의 자유와 선정성 논란, 다시 말해 예술과 외설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코미디가 모두 예술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의도적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만드는 창작행위라는 차원에서 코미디를 예술과 같은 맥락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술과 선정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코미디와 선정성의 관계에 대해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현실의 무언가를 변형하거나 바꾸는 것, 혹은 그러한 욕망이 표현되어온 것이 예술이라면 코미디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예능의 기획, 예능에서의 표현 또한 현실과의 불일치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서술을 하고 있다. 생각과 직관된 것, 즉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고 우리는 그런 깨달음이 유발하는 발작적 요동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직관과 생각 사이의 그런 대립이 갑자기 드러나면 항상 직관이 분명히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 왜냐하면 직관은 착각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된 영역이며 외부로부터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명증적이기 때문이다. 직관과 생각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는, 추상 개념들로 이루어진 생각은 직관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과 섬세한 차이들을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사고에 대한 직관 인식의 이 승리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직관은 원초적인 동물적 본성에 내재하는 인식 방식이기 때문이다. 의지에 직접적인 만족을 주는 모든 것은 이 방식으로 제시된다. 즉 그것은 현재, 향유, 기쁨의 매체다. 또한 직관에는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사고는 정반대다. 그것은 두 번째 층위의 인식 노력이다. 이것을 행사하는 데는 몇 가지, 종종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사고의 개념들은 종종 우리의 직접적 욕구 충족에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미래, 진지성의 매체로서 우리의 우려, 후회 그리고 모든 걱정의 전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엄격하고 지칠 줄 모르는 성가신 가정교사인 이성의 허점을 드디어 한번 확인해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웃음의 표정이 기쁨의 표정과 매우 닮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홍주 옮김(랄프 비너), 앞의 책, 316쪽.
결국 인간은 다원한 것을 탐구하려는 동시에 그 작업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쉬운 것으로 환귀하고자 하는 회귀적 본능이 있다. 웃음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순화시켜주며 현실을 재인식하도록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리즈에 등장한 장면 중 멀쩡한 사람을 수차에 묶어 돌려 수차 밑단에 설치된 양초더미에 얼굴을 박게 한다든지 하는 상당 수준 급진적인 성격의 웃음 유발 장치들도 하나의 예술행위로서 설명될 수 있다. 앞서 비유적 표현으로서 언급되었던 구보타 시게코는 그녀가 벌였던 행위예술 <버자이너 페인팅>같은 것들로 인해 심오한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이 자신의 생식기에 붓을 꽂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꽤나 불쾌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범용한 예술의 행태가 아닌 것이다. 시리즈도 이와 유사한 맥락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남성의 생식기와 전라의 상태, 여성의 젖가슴을 수차례 노출하며 웃음을 유발하려드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위함이다. 그 쾌락은 현실 원칙에 반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삼는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즐기는 시청자와 불쾌를 느끼는 시청자, 입장차에 따라 쾌와 불쾌를 느끼는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를 내포하는 쾌락이다. 이토록 극렬한 ‘예능 행위’는 구보타 시게코의 여성, 성차의 문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퍼포먼스의 ‘예술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를 통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했듯 현실 원칙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에 이르는 장구한 간접적인 여정에 대한 한 단계로서 만족의 지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의 포기, 불쾌를 잠정적으로 참아 내는 일을 요구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쾌락 원칙은 <교육시키기>가 대단히 힘든 성적 본능에 의해서 구사되는 작업 방법으로서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리고 쾌락 원칙은 이러한 본능에서 출발해서, 혹은 자아 그 자체 속에서, 유기체 전체에 손상을 입히면서까지 현실 원칙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윤희기, 박찬부 옮김(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파주: 열린책들, 2004b), 273쪽.
아울러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불쾌는 <지각적> 불쾌다. 그것은 불만족한 본능에 의한 압박에 대한 지각일 수 있고, 또는 그 자체로 고통스럽거나 혹은 정신 기관에 불쾌한 기대감을 자극하는, 다시 말해서 그 기관에 의해서 <위험>으로 인식되는 외부적 지각일 수도 있다. 이러한 본능적 요구와 위험의 위협에 대한 반응, 정신 기관의 고유한 행위를 구성하는 이 반응은 정확한 방식으로 쾌락 원칙이나 이것의 변형인 현실 원칙에 의해서 조종될 수 있다. 위의 책, 275쪽.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지점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외설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극명한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구체적 행위가 가지고 있는 파격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그 행위를 담아내고 있는 매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중파 방송과 그 방송의 방영에 힘입어 출시된 DVD는 매우 광범위한 시청 대상층을 가지고 있다. 선별적으로 접근, 수용할 수 있는 구보타 시게코의 예술과는 달리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매체를 전달 통로에 비유한다면 이것은 결국 제공 대상에 대한 분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패러디에 관한 분석도 빼놓을 수 없다. 패러디 역시 예술에 해당하는데, 패러디의 사전적 정의는 문학과 관련지어 정의한 것으로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런 작품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웃긴 것의 기본 성격, 즉 불일치는 오히려 웃기기 위한 단순한 과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위의 책, 311쪽.
패러디의 방법은 진지한 시 또는 연극에 나타나는 사건 또는 말의 실체를 보잘것없는 저열한 사람들, 하찮은 동기 또는 행위에 의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패러디는 그것이 제시하는 범속한 현실을 해당 주제에 관한 기존의 고상한 개념 안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이때 그것이 제시하는 현실은 어떤 면에서는 그 개념에 걸맞아야 하지만 그 밖의 점에서는 그것과 매우 불일치해야한다. 위의 책, 311쪽-312쪽.
시리즈에서도 패러디 기법을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프로그램의 멤버 엔도를 모방하는 한 남성이 그 대표적인 예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남성은 엔도의 실제 전 부인인 치아키와 부부행세를 하며 기이한 행각을 펼친다. 그 기이한 행각은 치아키를 유혹하려 한다든지 그녀 앞에서 웃통과 바지를 벗어제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오롯이 예술로만 성립하는가에 대한 여부에 있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전 부인을 출연시켜 전 남편을 연기하는 자와 대응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다. 상식이라는 기준치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존재하지만, 사회 내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 적어도 그러한 일이 일상생활의 가족성원 내에서 쉽사리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외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약자에 대한 혐오

사실 선정성의 문제라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상대적 약자를 대하는 심리적 방식에 있다. 물리적인 폭력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이지만, 시청각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으로 비화되는 심각성은 사실 태도적인 측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는 앞서 분류한 예능 폭력의 종류 전체에 해당하는 형태로, 이른바 전방위적 선정성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전반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나누어보면 인종혐오,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리즈의 각종 기획과 등장인물 기용에 관해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이 접근해볼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지만 어쨌거나 과도기에 있는 단일민족사회 일본, 일본의 예능에서 ‘흑인’을, ‘흑인 학생’을 기용한다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흑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학생이 출석을 부를 때도 별다른 유머를 시도하지 않았음에도 아시아인 무리 속에서 출석을 부르고 있는 그 흑인 학생의 존재자체가 유머로 성립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울이나 도쿄의 길거리에서 흑인을 본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차마 면전에 대고 웃을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웃음을 참거나 웃음기를 감춘 채 귓속말로 속닥거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안방극장에 편안하게 누워 소리 내 웃는 적극적 행위로 전환된 것과 같다.
레이쟈 라몬 하드게이 즉, ‘하드게이’라고 하는 캐릭터 역시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프로레슬러 출신 이력답게 우락부락한 몸으로 유명한 그는 커밍아웃한 바대로 동성애자다. 그가 선보이는 특유의 춤사위는 생식기 부위를 앞뒤로 흔들며 성행위를 묘사하는 춤이다. 사실 이런 부류의 춤은 그다지 웃기지 않다. 오히려 진지하게 이성에게 섹스어필을 하거나 추잡함, 난잡함을 강조해 곳곳에서 비명소리를 이끌어내는 데 적합하다. 한데 그 비명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그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점차 개방되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쉬쉬하는 경향이 짙은 가운데, 너무 대놓고 ‘동성애질’을 해버린다는 그 부조화의 의식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놓고 문란함을 강조하는 바람둥이 늑대와 바람둥이 여우는 경우에 따라 선망과 경멸의 대상이 될 뿐 별반 웃기지 않다. 하지만 대놓고 문란함을 내세우는 게이와 레즈비언은 손쉽게 조롱의 대상으로 격하될 수 있다. 그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이성애자들로부터 경멸의 코드는 남아도 적어도 선망의 대상성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게이는 더럽다, 성소수자들은 추잡하고 난삽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장한다.
마찬가지로 ‘가슴이 큰 여성’, 좀 더 정확히는 ‘가슴이 큰 백인 여성’을 등장시켜 가슴으로 캔을 부숴버리도록 지시하는 것은 그 동작 자체로 위화감을 조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순간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남성 무리들 사이에서 어떤 지위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그를 지켜보던 멤버들은 남성들이다. 엄연한 남성들이다. 집단화된 남성과 단독자로서의 여성은, 게다가 타지에 들어온 외국인으로서 여성의 관계는 이중으로 심화된다. 잠시 동안 가해 집단과 피해 집단의 위치가 전복되어 버리는 것이다. 웃음을 참아내다 못해 엉덩이 체벌을 당해온 남성들은 일순간 그녀를 관음자적 시선으로, 절시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단순히 여성의, 외국인 여성의, 백인 여성의 가슴이 노출되었다는 것에서 발생하는 선정성에서 이런 인물 간의 역학적 관계 설정에서 오는 지위의 전복이 보다 큰 심각성을 제고하고 있다.
‘동물’이 소재로 사용된 적도 있다. 동물 병원으로 꾸며진 장소에서 의사가 양의 항문을 검사하고 원숭이와 바나나를 나눠먹으며 심지어는 돼지의 젖을 꼬집고 그를 입으로 빤다. 동물 학대라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브라운관 밖에서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벌여도 동물 학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중파 방송에서, 정식 발매된 DVD 영상에서 그런 행동을 벌인다는 것은 그 정도쯤은 해도 무방하다는 대의 즉 목적 달성을 위해 충분히 벌일 수 있을 법한 일이라는 의식을 조장하기에 충분하다. 보통 가학을 하고 피학을 당하는 자들이 시청각 자료에 등장할 경우 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학과 피학을 선택하여 감정이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동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시청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학과 피학의 중간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소 베일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가학의 극치로 전환되게 된다.
‘노인’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취약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치부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기용하는 것이다. 노인 투숙객을 등장시켜 화내는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데, 그의 콧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긴 코딱지는 숨을 내쉴 때마다 파르르 흔들리며 웃음을 갈구한다. 만약 젊고 건강한 미남자였다면 웃음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상당 부분 반감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보다도 고령화 속도가 빠른 나라로 가장 많은 노약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젊은이들이 외적으로라도 그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길 원하거나 응당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사회적으로 눈 밖에 나게 되는 습속과 더불어, 고령화 사회에서의 힘없고 불쌍한 노인들을 바라보는 이면의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선정성을 드러내는 부분은 ‘자학’과 ‘고문’의 장면이다. 말 그대로 자학을 하면서 고문을 당하면서 웃음을 탄생시키려는 시도들이다. 바구니에 가득 담긴 액체 양초를 온몸에 들이붓고, 경도로 그치면 다행인 화상을 실제로 입으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 외에도 끓는 물속에 있던 옷을 입다 화상당하기, 벌꿀이 가득 든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어 숨 참기 등은 역사적으로 독재 정권 하에서 실제로 자행된, 빈번하게 발생했던 고문의 방식이다. 차력을 이용한 코미디라고 보기에도 잔인한, 차력의 본래 목적성 자체가 전도된 극악무도한 행위에 가깝다. 한 남성은 거꾸로 매달린 채 몽둥이가 달린 특수 기계에 성기를 수차례 가격 당하고 폭발하는 쇠그릇에 엉덩이를 맞고, 거친 표면의 천 위를 엉덩이로 미끄러져 지나간다. 한마디로 고문의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동감 넘치는 비명을 들으면서 마음껏 웃으라는 것이다. 이때 관객, 즉 시청자는 안전지대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오는 위안을 웃음의 연료로 삼으라는 것이다. 인물들은 결코 자학을 하거나 고문을 당하는 걸 연기하지 않는다. 사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일정 부분 부상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연기가 아니다. 현실감 넘치는 빼어난 수준의 연기로 볼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지 오래다.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는 공중파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오늘날 한국의 케이블, 종편, 인터넷 방송들과 비교할만하다. 우선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시리즈의 폭력성과 전위성을 살펴보면, 이 프로그램이 상업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주류 채널에서 따라하지 않았는지, 즉 퍼져나가지 않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과 특징들이 다른 형식과 채널, 플랫폼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케이블 채널인 Comedy TV에서 시리즈물로 기획, 방영했던 <기막힌 외출>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사실상 공중파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많이 노출한 바 있다. 표현 수위의 제약이 약한 케이블 채널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그 인식의 안전망 속에서 많은 자유를 누린 것이다. <기막힌 외출 5>에서는 팬티만 입은 채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골프를 치는 와중, 젖꼭지 부위를 노출하면 벌칙을 받는 민망한 기획으로 웃음을 유도하려 들었다. 나아가 출연자의 젖꼭지와 함께 노출되는 팬티 부근에 익살스러운 나뭇잎 모양의 모자이크 처리를 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려들고, 젖꼭지를 노출해 벌칙을 받는 사람의 젖꼭지를 깃털로 간지럽히며 참도록 해 웃음을 유발하려 든다. 이에 벌칙을 받던 사람은 벌칙 수행자를 때려버린다. 시종일관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성의식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아울러 유명 종편채널인 JTBC의 토크쇼 <마녀사냥> 같은 경우, 성 담론을 대중적으로 양성화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불가피하게 선정적인 양태를 보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성적 표현들을 여과 없이 언급해 방통심의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은바 있다. 「방송심의에관한규정」 제35조(성표현) 제2항 ‘지나치게 선정적인 묘사를 하거나 성을 상품화하는 표현 사용’ 위반으로 방송사 재허가시 감점 대상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벌점 5점) 제재를 의결 당한 것이다. 출연자들이 여성의 속옷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거나 안대라고 표현하는 장면이나 직접 착용하는 장면 등이 문제가 된 것인데, 이러한 발언이나 동작이 앞서 설명한 매체의 경계성으로, 암묵적으로 계승되는 수위의 연계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콘텐츠의 공급자와 수용자의 구별이 모호한 인터넷 플랫폼에서는 무수하게 많은 선정적 콘텐츠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몇 가지 괄목할만한 예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신태일유튜브>라고 하는 한 인터넷 방송은 개인이 자신의 마음대로 진행하는 방송으로, SP 시리즈에서 웃음 유발하기 위해 저질스럽게 분장하고 연기하는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길거리에서 투명인간과 가상의 싸움을 벌이는 연기는 흡사 시리즈에 등장해 타이즈만 입은 채 홀로 온갖 기괴한 동작을 펼치는 에가시라 히데하루(江頭 秀晴)를 연상시키게 한다. 실제로 공개된 장소에서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욕설과 주먹질을 하더니 이내 바지를 내리고 팬티만 걸친 채 어디론가 걷기 시작한다. 아울러 팬티만 걸친 채 자신이 투명인간이라고 주장하며 번화가를 걷다 길 한가운 데 앉아 누군가가 던져주는 동전을 받아 속옷 안에 집어넣는 연기를 펼치기도 하고, 동네 바보를 연기하기도 하며, 물총은 든 채 전쟁 상황이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3) 상업적 성공의 문화사회적 의미

이렇게 극단적인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가 얻은 상업적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서론에서 밝혔듯 요시모토 뉴스센터의 2012년 12월 6일 기사에 따르면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프로그램의 SP 시리즈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를 포함한 전체 SP 시리즈, 총 18편의 DVD 누적 판매 합계가 400만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집계 혹은 입장표명을 위한 회사의 명분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해도, 영화도 아닌 텔레비전 방송, 예능으로서 경이로운 판매 수치를 기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순하게 잘 팔리는, 인기 있는 방송이라는 사실을 넘어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 DVD 시장을 점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향후 DVD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만한 성과를 낸 것이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가 일본 사회 내에서 소비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의 독자적 습속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이러한 엽기적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일본의 특수한 사회문화를 반영하는 기현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전위적인 게 가장 상업적이 되는 현상인데, 이러한 현상은 일본인들의 전통적, 나아가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현대적 특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사회나 집단적 ‘콤플렉스’는 찾을 수 있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억눌린 자아’가 언급되곤 한다. 이를 과장되게 일컫자면 ‘사회적 자폐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일본에서는 매사를 얌전하고 조신하게, 혹은 얌전하고 조신한 척하면서 눈치를 보는 문화가 익숙한 듯하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동전의 양면처럼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형태의 교양 있는 시민의식 등으로 선용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동전의 이면은 소극적이고 무비판적인, 가식적인 성향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는 곧 전체주의적 특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은 집단적으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를 조심하는 것이 규범적이고 보수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폭력을 장난처럼 만들어버리는 극단적인 입장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극적이고 가혹한 예능 프로그램이 대리만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웃음과 폭력이 맞닿아있는 곳이기도 한데, 바로 둘 다 욕구 해소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퇴근길 지하철에서 타인을 건드리는 실수를 범했을 때 서로 ‘스미마셍’을 외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와 상대를 발가벗겨 구타하는 물리적 폭력을 상용화한 프로그램에 박장대소를 하고, 다음날 다시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미마셍’을 외치게 되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다. 선정성을, 선정성의 당위를 일정 부분 정당화시키는 이 코미디는 시민들의 일상에서 자위를 위한 용도로, 배설을 위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화 현상은 관점과 입장에 따라, 표현에 따라 장단점 모두로 수용될 수 있겠으나, 가장 본능적 원형인 웃음으로 회귀하는 용도 차원에서, 더욱 더 통제 불가능한 미디어의 야만적 표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해당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상호적 콤플렉스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표현을 못하고 사는 것에서 뭉뚱그려진 욕구가 광기 넘치는 웃음을 통해 배설되는 것인데, 그렇게 집밖에서 자기표현을 못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연유에는 강박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드럽고 나긋나긋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다보니 강박적으로 중간이 되고자 한다. 중간의 범위에서, 중간 지대의 안전선으로부터 이탈하는 즉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 과도할 정도로 극단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자극적인 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높은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을 입증한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억눌려 있다는 것이다. 마땅한 배출의 통로가 없는 것이다. 적절한 수준에서 활용 가능한 이탈의 매개가 부족한 것이다. 중간층에 머물면서 안전성도 느끼지만,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로를 수정하거나 탈출할 수 없는 불안이 감지된다.

간접적으로나마 이러한 대리만족의 쾌감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의 예시로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 수치를 들 수 있다. 편성 수치를 보면 버라이어티의 수량이 과도하게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텔레비전은 버라이어티의 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의 방송 중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인 NHK보다 민영방송사가 시청률 확보를 위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전략적으로 편성하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민영방송의 아침과 저녁의 뉴스 프로그램도 단지 보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오락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락적 소재나 요소가 대다수의 방송에 침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진수, 김태경 외, 『일본대중문화의 이해』(서울: 역락, 2015), 71쪽.
그렇게 사소하고 소소한 웃음의 연결고리들을 다수의 프로그램들 내부 곳곳에 배치해두어 변곡점을 생성해낸다.
대표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태도에 주목한다면, 이러한 프로그램의 문화사회적 의미의 한 단면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국 내에 있는 사람들을 크게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경향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좀 더 특별한 집단의식이 있다. 유시민은 『유시민과 함께 읽는 일본문화이야기』를 편역하며 일본의 다음과 같은 측면을 강조한 바 있다. “거친 바다에 둘러싸인 섬나라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외부와 피를 섞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이런 인종적 동질성을 자기네의 장점으로 여긴다. ‘우리 일본인은……’하는 식으로 입을 떼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모든 일본인이 세상만사에 대해서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으며 똑같이 행동한다는 투다.” 실제로 일본인의 삶에는 지리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역사 기록이 시작되는 6세기 이후에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조용하게 살 수가 없었다. 10세기 무렵 수도였던 교토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시민은 일본인들이 북적대는 시장통에서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독자적 개성이라는 관념을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유시민, 『유시민과 함께 읽는 일본문화이야기』(파주: 푸른나무, 2002), 10-12쪽.

이러한 배경은 ‘우치’와 ‘소토’에 대한 개념으로 이어진다. 일본인은 외국인을 자기네들끼리 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대한다. 외국에 가서도 자기네 나라 안에서와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 이것은 우치(ウチ, 인사이더)와 소토(ソト, 아웃사이더)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대접받고 적절한 관심을 얻으려면 우치가 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무슨 문제아 취급이라도 받으려면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관심조차 끌 수가 없다. 소토에게는 그저 겉으로만 상냥할 뿐 사실은 관심이 없다. 소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일본인들에게 외국인은 그냥 소토에 불과하다. 위의 책, 9-10쪽.

일본인은 집단생활을 하는 종족이다. 자기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자립형 인간이라면 우치와 소토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집단의 일부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면, 때로 위험하더라도, 하다못해 못된 패거리에라도 가담해야 한다. 일본 사회에서 인사이더가 되느냐 아웃사이더가 되느냐는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위의 책, 13쪽.
일본인에게 일본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똑같은 가이진이다. 가이진은 일본인과 같지 않으며 절대 같아질 수도 없다. 일본에서는 외국인 콤플렉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때 외국인은 다른 동양 사람이 아니다. 흑인도 아니다. 키가 크고 롱다리에다 금발이나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럽인이다. 서양 사람들은 ‘외국인은 어째서 우리랑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왜 자기네가 그들과 비슷해질 수 없는지 자문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머리를 물들이고 푸른색 콘택트렌즈를 낀다. 어떤 여자들은 젖꼭지 주위가 연분홍색으로 보이도록 특수 화장품을 바르기도 한다. 이런 선망 때문에 유럽의 모델과 배우, 록스타들이 자동차에서부터 감기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품 광고에 동원된다. 위의 책, 13-15쪽.
정리하자면 일본은 국가 전체가, 사회 전체가 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사한 의식과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성과 관련한, 국가 정체성과 관련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그 단일적 의존성은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상호적 교통의 형태를 띠는데, 그 의존의 대상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순간 외부 출신의 존재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외적 존재로 격리되는 현상을 겪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정이나 아쉬움, 일말의 미련 없이 대상을 희화화시켜버릴 수 있는 여지가 생성되는 것이다.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웃음의 소재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때의 외국인은 외국인으로서의 외국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의 외국인에 가깝다. 시리즈에 동아시아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외모적으로 이질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일관적으로 흐르던 진지함과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이다. 백인은 주로 아름답고 귀여운 외모의 여성들이 출연을 하고, 흑인은 주로 못생기고 무서운 남성들이 출연을 한다. 백인은 주로 과격한 연기가 없는 가벼운 웃음을 도맡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극에서 코미디를 본격적으로 구동하게 되는 건, 과격하고 도발적인 연기를 펼치게 되는 건 타 인종의 몫으로 남는다. 이것은 범용하게 널리 퍼져있는 사회적 시선, 실생활 내의 관점과 전연 다를 바 없는 미디어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비슷한 자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내재적 콤플렉스로 인해 파생되는 배타적 폭력성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국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청자와 프로그램의 고정 멤버들을 웃기기 위해 웃음 유발자로 등장하는 오와라이 게닌(お笑い芸人)들은 하나의 외적 존재로 여겨지게 되는데, 그들은 다수의 시청자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진 소수에 해당한다. 그들은 일상적이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다수의 일상적 양태와 유리된 행위를 반복적으로 선보이며 내적 존재로부터 배척된다. 그들을 내적 상태에서 외적 상태로 격하시키면서 폭력성과 선정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그들이 연기를 펼치는 순간, 더 이상 내적 존재로 군림할 수 없기 때문에 점점 더 높은 수위의 행태를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콤플렉스는 소위 ‘피해자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콤플렉스에 관한 정신분석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일본 사회 전체의 논리를 떠받치고 있는 이 의식, 가해자 의식보다 피해자 의식으로 비대화되어 있는 이 의식은 사회 깊숙한 부분에 널리 퍼져 공유되고 있다. 일례로 국체에 대한 담론 중 이런 것이 있다. 일본국의 본체를 가리키는 ‘국체’는 다른 나라에 종속을 당할지언정, 정체의 근본이념이 변할지언정, 변하지 않는 관념일 것이다. 이것은 국체를 정의할 권리가 정부에도 천황에게도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 신주방위파의 사고방식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국체에 관한 규정을 ‘난센스’라고 웃어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일본의 국민적 아이덴티티의 중심은 “다른 나라에 종속당할지언정, 정체의 근본이념이 변할지언정, 변하지 않는 것”, 요컨대 “상황을 변동시키는 주체적 작용은 항상 밖에서 도래하고 우리는 늘 수동적 처지”라는 자기 인식의 방식 자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경원 옮김(우치다 타츠루), 『일본변경론』(서울: 갈라파고스, 2012), 66쪽.
이것은 결국 동력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내부자적 수동성을 지니고 있는 핵심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신들을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 사회에서는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마조히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가학과 피학을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시리즈의 주된 소비 심리 기제다.
사디즘이라고 하는 가학성이 소비의 축으로 강조되려면 사실 극단성의 범주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시청자 집단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가깝다. 항문에 가루를 집어넣고 상대방 얼굴에 분사하는 등의 행위들 즉, 성기나 가슴 등의 치부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 분명 시민들로 하여금 과격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지점이 제거된, 양 극단에 위치한, 맨 끝에 위치한 폭력적 성질이 포함되지 않은 정도의 양상이라면 가학성이 하나의 중요한 소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단계를 넘는 순간, 정상적인 사람들은 피학에 집중하게 된다.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의 시청자와 구매자는 한둘이 아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지 않은 순간에는 보편의 정서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회성원들인 것이다. 그러한 경위에서 그들은 그들이 무던하게 가지고 살아온 보편타당의 기제 즉, 피해자 의식으로 프로그램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에서 이와 연관 지을 수 있는 해석을 서술할 바 있다. 인간의 본능적 삶에서 마조히즘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신비스러운 것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 기관의 1차 목표가 불쾌를 피하고 쾌를 취하는 쾌락 원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마조히즘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고통과 불쾌가 단순히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목표가 된다면, 쾌락 원칙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정신생활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마약을 먹고 행동 불능 상태가 된 것과 같을 것이다. 윤희기, 박찬부 옮김(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417쪽.

사디즘이 자신에 반해서 되돌아서는 일은 주체의 파괴적 본능 요소들 중 많은 부분이 ‘본능에 대한 문화적 억압’에 의해서 현실 생활에서 실현되지 못하도록 제지받는 곳에서 정규적으로 발생한다. 뒤로 물러선 이러한 파괴 본능이 자아 속에서 마조히즘의 강화 요소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서 되돌아온 파괴 본능은 그러한 변형 없이 초자아에 의해 취해져 자아에 대한 초자아의 사디즘을 강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양심의 현상을 통해서 추론해볼 수 있다. 초자아의 사디즘과 자아의 마조히즘은 상호보완적 성격을 띠며 둘이 결합해서 같은 효과를 낸다. 단지 이 방법을 통해서만 본능의 억압이 어떻게 해서―자주, 혹은 아주 일반적으로― 죄의식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의 양심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성을 억제하면 할수록 더 심각하고 더 민감하게 되는가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은 문화적 관점으로 보아서 바람직하지 못한 공격적 행위를 범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그 이유로 해서 훌륭한 양심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자기 자아에 대한 감시를 완화할 것이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대는 보통 윤리적 요구가 1차적인 것이며 본능의 포기는 그 뒤를 따라 온다고 보는 상황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윤리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 놓는다. 실은, 그 반대인 것 같다. 첫 번째로 외부 세계에 의한 본능의 포기가 강행된다. 이것만이 윤리 의식을 창출하는데, 이 윤리 의식은 양심에서 자기표현을 하며 더 많은 본능의 포기를 요구한다. 윤희기, 박찬부 옮김(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431-432쪽.
한발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매 맞는 아이』를 통해 사디즘이 마조히즘으로 바뀌는 것은 억압 행위에 끼어드는 죄악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황보석 옮김(지그문트 프로이트)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파주: 열린책들, 1997), 157쪽.
정리하자면 결국 자기표현의 한계를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던 사회성원들이 억눌린 자아의 얼굴을 사디즘으로 드러내고자 시도하다, 극렬한 코미디 행각과 마주하게 되면서 죄악감을 느끼고 마조히스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소비 심리의 핵심이다.

Ⅲ. 결론

사실 상업성을 비판하는 담론에 있어서는 다소 빤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상업성보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정서의 보존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시대착오적으로 경색된 나머지 최신의 표현 방식을 배척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웃음을 위해서라면 거의 모든 것들을 과용하는 사회도 그다지 훌륭한 정서를 가진 사회는 아닐 것이다. 명랑하되 명랑함으로 인한 위화감이 없는, 그 둘 모두를 가진 ‘균형 잡힌 사회’가 좋은 사회로 평가받을 수 있다. 언젠가부터 마치 개방에 반대하면 보수적인 것, 젊지 않은 것, 뒤쳐진 것, 낡은 것이 되어버리곤 하는데,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고 그 분야의 하부구조에는 세부적으로 접근해야하는 요소들이 많아 새것과 옛것, 세련된 것과 도태된 것 등으로 일괄하여 말할 수 없다.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는 상업적 성과에 경도된, 배금주의의 늪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것은 결국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상규의 정서’를 배제한 채 축적된, 과열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 시리즈를 위시한, 비근한 종류의 프로그램들이 상업화된 매체 구조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주류의 선정적인 프로그램들이 선례가 되어 비주류 매체 혹은 B급 채널로 이전되고 확장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류 매체에서 보기 힘든 표현 방식과 수위를 지닌 즉, 주류 같지 않은 비주류의 양태를 가진 주류 채널의 방송이 인기를 끌게 되면, 여타 주류 방송에서는 시청률을 사수하기 위해 자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비주류 방송에서는 그를 따라하고 싶은 욕망이나 욕구, 제한이나 한도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넘어서고 싶은,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심리를 발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접근은 오늘날 방송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이전에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모방, 반복되는 차원에서 이뤄졌던 것과 달리 또 다른 ‘방송’의 형태로 ‘매체’를 통해 확산된다는 점에서 좀 더 구조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다양한 방송 자본의 영향에 따라 방송 플랫폼은 다변화하고 있고, 앞으로도 꾸준히 변화할 것이다. 방송 플랫폼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되면 코미디의 선정성 문제는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에 드러나는 폭력성이 다른 형식과 채널, 플랫폼 등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게 주목해야 할 문제다. 이 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해 텍스트 분석과 상호매체적 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이 이 글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예능계의 영역에 있어 일본은 한국의 미래인가? 아니다.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대부분의 것들이 양국 간 비슷하게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예능의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다를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점차 흐릿해져가는 표현 수위의 경계선과 매체 간의 경계선을 분명한 경계선으로 강조하고 확장할 경우, 한국은 한국만의 정서로 예능의 특정 담론을, 특수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예능의 서사는 내부적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외부적 상황과 법안, 규제의 틀로도 공고해질 수 있는데, 미디어에 건전성을 담보하자는 주장은 건전한 사회, 안전한 사회, 교육을 논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서론에서 일본이 겪은 경제적, 사회적 현상이 한국의 몇 년 후가 되고 있는 지정학적, 문화적 특수 현상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적어도 미디어에서는 많은 부분 방향성을 선회할 수 있다. 그 장르가 전 연령에게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는 예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동시대적인 시류를 관찰하되 그 시류에 적용 가능한 보호 장치, 경계 장치를 견고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 국내 실정에 맞춰 용인되고 있는 것들 너머로 다채로운 소재와 제재를 사용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되 과잉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심지어 이것이 예능의 본질, 웃음을 논하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규제로 재미가 떨어지게 된다는 건 경우에 따라 편견에 해당할 수 있다. ‘정서 보호’와 더불어 ‘금기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웃음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금기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은 결국 양질의 웃음을 공급하기 위한 정석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지그문트 프로이트.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 파주: 열린책들, 2004a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파주: 열린책들, 2004b
지그문트 프로이트.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 파주: 열린책들, 1997
마크 실링. 『일본대중문화 여기까지 알면 된다』. 서울: 초록배매직스, 1999
박진수, 김태경 외. 『일본대중문화의 이해』. 서울: 역락, 2015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 서울: 시아, 2009
유시민. 『유시민과 함께 읽는 일본문화이야기』. 파주: 푸른나무, 2002
우치다 타츠루. 『일본변경론』. 서울: 갈라파고스, 2012

<학술, 학위논문>

김선관.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웃음’ 생성에 관한 연구 : KBS-2TV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 분석을 중심으로”. (서울: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11-12쪽.
이선웅.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머 분석”. (대구: 한국어문학회, 2005). 11쪽.

부록: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
SP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의 선정성의 구체적 사례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여관>(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시리즈>가 탄생했다. 해당 시리즈는 일종의 고착화된 관습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을 돌발적으로 제시해놓은 뒤 웃음을 터뜨린 멤버에게 벌칙으로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주요하게 사용된 벌칙은 마치 원주민이 독침을 쏘듯 반나체 혹은 나체가 된 멤버들의 엉덩이에 침을 불어 날리는 방식이다. 벌칙 수행원의 수는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여러 명이 동시에 침을 불어 날리며 고통을 배가시킨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유가와라온천>(2004년)에서도 벌칙 게임은 이어진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단체로 등장하여 회초리로 엉덩이를 후려친다. 단순한 체벌뿐만 아니라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못생긴 할머니를 희화화하기도 하고, 발음이 어설픈 흑인을 스님으로 등장시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음식에 스타킹을 넣은 뒤 먹게 하기도 한다. 야마사키는 스타킹을 정체모를, 다소 질긴 음식정도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씹다가 곤혹을 치르게 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고등학교>(2005년)에서는 생도가 등장하여 죽도로 엉덩이를 때린다. 이번에도 흑인을 등장시키는데, 흑인 학생을 빈혈로 쓰러지게 한 뒤 어색한 발음으로 헛소리를 하도록 연출한다. 잠시 후 그 흑인 학생은 같은 반 학우로 등장해 단지 출석을 부르는 과정만으로 웃음거리가 된다. 하드게이 캐릭터가 등장해 자신의 생식기 부분을 앞뒤로 움직이는 춤사위를 선보이고, 아주머니 경관들을 출동시켜 다나카와 엔도, 마츠모토에게 강제 키스를 하게 한다. 심지어 아주머니 경관들은 마츠모토의 다리 사이를 막대로 쑤시기도 한다. 이때 벌칙 기획자 역할을 맡은 하마다는 멤버들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경찰서>(2006년)에서도 대동소이한 벌칙은 계속된다. 경찰이 사용하는 곤봉 모양의 막대로 엉덩이를 맞는다는 콘셉트로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찰이 된 멤버들은 각종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경찰차로 연행된 한 만취 상태의 여성이 옷을 벗으려 시도하는 걸 제지하는 일 등이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병원 24시>(2007년)에서도 흰 옷의 간호사로 분한 멤버들은 검은 옷을 입은 간호사들에게 곤봉으로 엉덩이를 맞는다. 의사로 출연한 미아사코는 호토하라를 이단옆차기로 걷어 차버리고, 가슴이 커져버리는 병에 걸렸다며 등장한 한 백인 여성은 가슴으로 캔을 부숴버린다. 멤버들은 MRI를 촬영하기 위해 들어간 곳에서 기계 상단부에 매달려 있던 할머니와 강제로 키스를 나누게 된다. 이외에도 남성이 임산부를 희화화하듯 흉내 내며 연기를 펼치기도 한다. 동물 병원으로 꾸며놓은 세트장에서 양과 원숭이, 돼지 등이 등장하여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분투하는데 그 방식은 가히 변태적이다. 양의 항문을 검사하고 의사가 원숭이와 같이 바나나를 나눠먹으며 돼지의 젖을 꼬집는 행각을 벌이는 것이다. 심지어 돼지의 젖을 직접 입으로 빨기도 한다. 돼지는 비명을 지른다. 결말 부근쯤에 이르러 등장한 한 남자는 얼마 전 가슴 성형을 받았다며 입고 있던 브래지어를 마음대로 벗어재낀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신문사 24시>(2008년)에서는 버스에 탑승해있던 멤버들 앞으로 뚱뚱한 여장남자가 제복을 입고 등장하여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웃음을 참지 못한 멤버들은 연필 모양의 곤봉으로 엉덩이 체벌을 당하게 된다. 연이어 버스에 탑승한 두 명의 사내는 삶은 계란을 입안에서 없애는 마술을 시도하는데, 계란을 입속에 넣는 남성 측에서 사실 그건 불가능하다고 손사래를 치자 그 반대 측 남성은 목구멍이 작은 게 문제라고 지적하며 상대방의 입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린다. 그 외에도 외국인이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 안에 사람을 넣고 얼굴만 간신히 밖으로 빼내게 한다. 신문사에 도착한 뒤 만나게 된 괴이한 얼굴 분장을 한 국장은 바지를 벗고 남성 생식기 모양의 코끼리 팬티를 보여준다. 그가 책상 위로 올라갈 때는 모자이크 처리로 간신히 치부를 가릴 수 있을 따름이다. 춤을 추는 여성 무도가가 다리를 벌리는 춤을 출 때 여성 생식기 부위에 장수를 기원하는 한자, 목숨 수자를 붙여놓는다. 우동 면을 반죽하면서 점차 여성의 가슴과 젖꼭지를 연상시키는 식으로 반죽하는 개그나 갑작스레 벌어진 레슬링 경기에서 한 선수의 옷을 강제로 벗기면서 나체로 만드는 개그도 존재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호텔>(2009년)에서는 노인 투숙객이 등장하여 멤버들에게 화를 내게 되는데 그의 콧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코딱지가 유난히 길게 서서 숨을 내쉴 때마다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근육질의 남자들이 북을 치게 한 뒤 바로 다음 타이밍에 깡마른 노인이 힘없이 북을 치게 해 그를 조롱거리로 만든다. 세상에 보기 흉한 에로를 퇴치하기 위해 출동했다고 외치는 여성 삼인방은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가슴으로 악당을 물리친다. 음악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추던 에가시라는 자신의 바지 속 생식기 부근에 손을 넣은 뒤 그를 위로 쭉 끌어올리며 기둥모양을 만든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어진 망년회에서는 훈도시만 걸친 남성들이 일렬로 앉아 선물을 주고받고 있다. 그 선물들은 가히 엽기적이다. 반딧불 변신세트라면서 엉덩이에 불을 붙이고, 종아리에도 테이프를 붙여 다리털을 떼버린다. 가슴에 부항을 뜨고 뒤통수에 풍선을 댄 뒤 얼굴 전체에 비닐을 씌워 바람을 넣고 터뜨려버리기도 한다. 풍선이 터지고 난 뒤 또 다른 남성이 앞으로 나와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입으로 분다. 큰 컵에 분유를 가득 담아 강제로 마시게 한다. 분유를 마신 남성은 참지 못하고 바로 토해낸다. 줄이 연결된 빨래집게를 성기에 꽂아 로켓에 단 뒤 로켓을 발사시켜 성기에 고통을 가한다. 남성용 찜질방에 가슴을 전부 드러낸 채 누워있는 여성을 등장시켜 웃음을 자아내려 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스파이>(2010년)에서는 긴타로(金太郎) 복장을 한 자와 갓파(河童) 복장을 한 자가 버스에 올라타 전투를 벌이는데, 그들은 의상에서 성기모양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어있는 부분으로 공격을 펼친다. 한 스트리퍼는 버스 의자에 앉아있던 중학생을 상대로 옷을 벗어재낀다. 멤버들은 과거 시리즈에서도 종종 그랬듯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무에타이 선수에게 타이 킥을 맞는다. 또다시 등장한 훈도시 차림의 사내들은 더욱 엽기적으로 강화된 차력을 선보인다. 흡착기로 입을 빨아들이고 기계에 장착된 부채로 뒤통수를 내려치고, 실제 뱀에게 손을 물리기도 한다. 엉덩이에 큰 불을 붙이고 풍선을 머리 뒤편에 넣고 스타킹을 씌운 채 바람을 불어 터뜨린다. 레슬러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고, 대형 원판에 사람을 묶어 돌려 밑에 설치된 수조에서 물고문을 당하게 한다. 야마사키는 무대에 올라 폭행을 당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공항>(2011년)에서는 멤버들이 스튜어디스로 여장을 한다. 공항으로 향하던 버스 차창 밖으로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의 팬티가 노출된다. 여장남자 마츠코 디럭스는 엔도를 불러들여 강제로 키스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키스는 장난스러운 키스가 아니라 현란한 혓바닥 놀림을 동반한 키스다. 또 멤버들의 얼굴 사진을 기존의 야한 사진들과 합성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이번에도 역시 훈도시만 두른 남성들이 대거 등장해 글로브가 달린 로켓에 몸을 얻어맞고 세탁기 안에 들어가 뜨거운 라면과 우동을 먹다 흘리게 되는 고문을 당한다. 뱀에 손을 물리고, 특제 소재로 된 솜을 엉덩이에 붙인 다음 불을 붙이기도 한다. 또한 바구니에 가득 담긴 액체 양초를 온몸에 들이부으며 화상을 입는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내려한다. 항문에 공기를 주입하기도 하고, 야마사키는 또다시 무대 위로 올라 따귀를 맞는데, 심지어 이번에는 목까지 졸리게 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열혈교사>(2012년)에서도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서 어김없이 웃통을 벗은 채 가슴에 부항을 뜨는 억지스러운 사건들이 펼쳐진다. 힘겹게 도착한 학교에서 여교사가 불량 남학생을 체벌하는 방식은 남학생의 바지를 내리고 팬티를 들쳐 올리며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치는 것이다. 마츠코 디럭스는 멤버들에게 강제로 주먹밥을 먹게 하고 남은 밥알을 얼굴에 발라버린다. 또한 터미네이터를 패러디하며 등장한 사내는 성기를 노출한 채 알몸 차림을 하고 있다. 훈도시 차림의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부터 거의 매회 출연하며 기행을 벌이는 에가시라는 주사기로 항문에 바람을 넣은 뒤 하얀 가루를 삽입해 엔도의 얼굴에 분사하는 행각을 벌인다. 훈도시 차림의 무리들은 엉덩이로 촛불 끄기 등 기초적인 단계로 시작해 머리에 쓰고 있던 수족관에 금붕어를 부어 입으로 건지기 등 생명을 이용한 개그까지 시도한다. 그 외에도 폭발하는 의자에서 우동 먹기, 겁에 질린 채 전기뱀장어를 만지다 감전되기, 러닝머신을 거꾸로 달리며 바닥에 놓인 뜨거운 국물에 면 찍어 먹기, 밧줄로 사타구니 난타하기 등을 자행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벌칙의 강도는 점차 상승하게 되는데 끓는 물속에 있던 옷을 입다 화상 당하기, 벌꿀이 가득 든 수조에 머리를 집어넣고 숨 참기, 항문에 공기를 주입한 뒤 먼저 항문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낸 사람이 지는 팔씨름 대결 등을 펼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지구방위군 24시>(2013년)에서 등장한 마츠코 디럭스는 멤버들에게 또다시 강제 키스를 한다. 사우나에서 사람이 흘린 땀을 모아 소금을 만들고 그 소금으로 찹쌀떡에 양념을 한 뒤 멤버들에게 먹게 한다. 훈도시 차림의 사내들은 로켓 폭죽을 가랑이 사이로 받아내고, 젖꼭지에 꽂은 빨래집개를 야구방망이로 쳐낸다. 끓는 물에 손을 넣어 칼국수 면을 집어 먹게 하고, 밧줄에 매달려 있던 공중그네 모양의 팬티를 입은 채 풍선을 터뜨리게 한다. 아래쪽에 촛농이 담긴 수차 위로 사람의 사지를 매달아 돌려 촛농에 얼굴을 담그게 한다. 마치 모종의 관습처럼 또 항문에 공기를 주입한 뒤 먼저 항문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낸 사람이 지는 팔씨름 대결을 벌인다. 아울러 한 남성은 침대에 누워 아기시늉을 하다 그만 성기를 노출하게 된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대탈옥 24시>(2014년)에서 버스에 탄 마츠코 디럭스는 반동 작용을 하는 기계에 성기를 가격 당한다. 수감자 콘셉트로 감옥에 도착한 멤버들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옆방에서 대변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라든가 아주머니의 모습들뿐이다. 스튜디오에서는 한 남성을 특수 의자에 매단 뒤 전진시켜 그 앞에 있던 마츠모토의 얼굴에 낭심을 비비게 한다. 야마사키는 예전 시리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괴상한 복장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가터벨트와 스타킹 차림의 반나체가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훈도시 차림의 사내들이다. 이번에도 그들은 빠짐없이, 기꺼이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데, 한 남성은 거꾸로 매달린 채 몽둥이가 달린 특수 기계에 성기를 수차례 가격 당한다. 폭발하는 쇠그릇에 엉덩이를 맞고, 거친 표면의 천 위를 엉덩이로 미끄러져 지나간다. 사내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비명을 지른다. 각종 무게를 지니고 있는 물건들을 차례대로 던지고, 그를 뜨거운 물로 가득 찬 양동이로 받아내게 한다. 뜨거운 단술과 양초가 담긴 양동이를 들고 미끄럼틀을 타게 해 결국 몸에 다 쏟아 붓게 만든다. 결말 부근에는 또 한 번 항문에 공기를 주입한 뒤 먼저 항문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낸 사람이 지는 팔씨름 대결을 벌인다. 경찰로 등장한 에가시라는 특유의 광기 넘치는 몸짓으로 자신의 제복을 스스로 벗어재끼더니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젖가슴을 빤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의 젖가슴을 빨게 한다. 그럼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의 팬티를 찢어버리고, 분사기를 이용해 그들의 바지 안으로 하얀 가루를 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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