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앞에 선 단독자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고충을 밝히며 관용을 호소하던 인터뷰 영상에 달린 댓글 중 하나. “고추 떼면 여자 되는 거냐? 구두 신고 화장하면 여자 돼? 에라, 난 고양이 좋아하고 인조 손톱 달고 있으니 오늘부터 난 고양이다!” 비록 정밀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진 않지만 일리 있는 일침으로, 본의 아니게 본질주의에 접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댓글이었다. 위 같은 현상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으로 ‘자기 수용’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지와 관계없이 현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주로 연예인, 교수, 작가 등 사회 명사들이 설파한 개념으로, 따지고 보면 다 뻥이다. 아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딩동, 땡!

개념을 전파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답이 나오는데, 다들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거나 성취를 경험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의존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문제는 특별한 기술이나 매력, 유명세가 없어 직장에 목을 멜 수밖에 없는, 심하면 무릎까지 꿇려, 고개 숙인 채 파일 케이스, 서류 뭉치로 정수리와 싸대기를 맞아가며 죄송해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지만 책임져야할 것들이 떠올라 참고 또 참는 서민들의 경우, 해당사항이 없단 거다.

처량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합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거나 합당한 처우를 받아내기 위해 평상시 세력을 규합하거나 눈치 보며 알랑거려야하는 상황 속에서 “오늘 나로서 나를 만났어.”라고 할 수 있을까? 재밌는 건 이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던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됐어. 통장에 100억 있어. 그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곳 가서 좋은 거 먹고, 운동하고, 쇼핑하고, 공부하며 자기 수용할 수 있단 거다.

그러므로 저런 종류의 강연이나 저서는 불특정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한 상술과 장사속일 뿐이다. 누구든지 잘 나가면 자기 수용할 수 있고, 못 나가면 자기 수용할 수 없다. 고로 사정과 상충되고 모순되는 개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시간에 신세나 처지를 개선하는 편이 더 낫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넘은 종교적 실존에 이르러 불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시대에는 ‘일 앞에 선 단독자’가 더 중요하다. 단독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주체적인 삶을 산다.

오히려 자기 수용의 개념에 적합한 대상은 일반 대중보다 장애를 겪고 있는 분들이나 중환자 분들이다. 거세포종 수술 이후 3번이나 재수술을 해 언제 또 재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부담감 속에 살고 있는 내 친구는 언젠가 문득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이런 말을 했다. “뭐 죽을 때까지 평생 안고 살아야지.” 잦은 수술로 등허리 부근이 다 터져 대학원 수업마저 서서 듣는 상황. 교수랑 둘이 서 있다. 얼핏 보면 삼국지 일기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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