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게 살지 않겠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는 한 일진 녀석의 심기를 건드려 맞을 뻔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함께 있던 친구들의 무리는 무려 열댓 명. 그러나 덩치 큰 한 놈에게 두들겨 맞을 까봐 아무도 선뜻 나서질 못했다. 나는 때마침 졸음이 와서 눈 좀 붙였다(꿀잠으로 피로를 풀었다. 피부도 좋아짐).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친구는 군대에 갔고 선임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다. “형, 해요.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겠어요.”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후임들은 의기투합해 상부 고발을 계획했다. 고발 당일, 친구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느냔 말이다!”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복도를 헤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PC(Political Correctness), 소위 말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일상다반사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정치적 올바르지 않음’을 추구하며 살지도 않는다. 단지 그때그때 생겨나는 ‘일시적 편향’에 의해 ‘케바케’로, 경우에 따라 살 뿐이다. 그게 정의로울 수도,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이라 자신이 선택한 것들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 사이의 가치 판단을 유보하려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반성을 통한 성찰의 기회를 걷어차도록 만들어버린다. 문제는 본인의 생존 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 걷어차 버리는 행위를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에게 해를 입힐 요량으로 일삼는 사람들이다. 전문용어로 안하무인.

안하무인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자기가 보고 들은 한정된 자원만을 진리라 믿는 태도로 일관하며 살아와 한 인간의 틀을 구성하는 식견 자체가 좁을뿐더러, 식견이 넓어지면서 얻게 되는 타자와 타성에 대한 이해력의 부재로 인해 만성적으로 내재화된 무의식적 불안감이 뭐 어때, 식의 자기합리화, 쟤네도 그러잖아, 식의 선택 치우침으로 변모하여 실상 돌이키기 힘든 지경에 이른(누군가 이걸 지적하면 지적에 대한 내용보다 지적한 사람을 적으로 규정, 반대를 위한 반대로 논박할 준비만을 일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들을 나타내는 용어다.

결론.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만을 추구하며 살 수 없다. 땅땅땅! 그러다 상처받는다. 물리적 근육량과 사회적 근육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대항하고자 할 때 ‘비열한 싸움’을 하지 않고 ‘선한 싸움’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올바름을 전적으로 추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족분을 효과적으로 메꿀 수 있다. 싸우자. 싸움의 목적과 수단이 후세대로 전승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선한 싸움’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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