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벤은 해미를 죽이지 않았다

물품 배달 일을 하는 종수(유아인)와 판촉 행사에서 춤을 추는 해미(전종서), 불현듯 둘 사이에 끼어든 벤(연상엽). 종수와 해미는 어릴 적 동네 친구다. 그들이 살던 동네는 파주의 한 마을, 저 너머 북한이 보이는 경계 도시다. 종수는 아직도 그곳에 산다. 텔레비전 뉴스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나와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외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압적인 지시로 어머니의 옷을 태운 경험이 있는 종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는 자위행위뿐이다. 우뚝 선 창문 밖 엔 서울 타워.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 오랜만에 연락해 돈을 요구하는 어머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불안정한 상태의 해미, 알 수 없는 부유함을 자랑하는 벤. 종수의 머릿속은 정념으로 가득하다. 비닐하우스를 확인하기 위해 달리던, 해미를 찾기 위해 내달리던 종수는 벤을 의심한다. 사실 벤은 해미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종수는 벤을 죽인다.

전형적인 현대 사회의 분노다. 상대적 박탈감에 의해 극대화되고 비화되는, 상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종의 피암시성을 교호로 느끼며 자라나는 성질의 분노이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는 위태로운 소유의 공간이다. 해미가 침대 아래 놓여 있던 ‘콘돔’을 종수에게 끼우던 모습, 비닐로 덮인 성기를 자신의 몸 안쪽으로 받아들이던 행위의 상징은 속칭 ‘좆집’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몽환적인, 상징적 질서 안에서 가까이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은 이내 해미를 태운다는 확신으로 전환된다.

결론적으로 <버닝>은 종수가 쓰는 한 편의 소설이다. 단절되고 분단된, 상실되고 유실되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 그 슬픔으로부터 유래한 정신적 외상, 더 큰 상처를 막기 위해 분투하는 우리네 삶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찾아다닌다. 잃고 난 후 깨닫게 되는 소중함과 영영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잃어버려선 안 된다는 불안을 함께 안고 산다.

이창동 감독은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소설 <Barn Burning>을 서사의 모티프로 삼았다고 밝혔는데, ‘burning’이라는 단어의 뜻은 물리적으로 ‘불타는’, 관념적으로 ‘격렬한’, ‘갈망하는’이다. 앞서 언급했듯 비닐하우스 혹은 ‘barn’은 위태로운 소유의 공간이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소유를 격렬하게 갈망하며, 타의 소유를 불태우고 있다. 자본주의적, 유물론적 분리와 분단이 최첨단의 시대적 맥락으로 변형되어 가는 거다. 관계를 끊어 내는 소유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배혼한 불안이라고 하는, 모종의 ‘정치적 기로’에 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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