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감수성

홍상수와 김민희의 불륜 논란이 뜨거웠다. 만약 언론에 드러난 정황이 사실이라면 지탄 받아 마땅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형법상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 영역의 비중을 높여 준 결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륜에는 여전히 민사적, 도의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언론 기사를 검색해 보면 각종 인신공격들로 넘쳐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김민희 저게 먼저 꼬드겼다, 쟤 이제 끝났다’식의 김민희에 대한 욕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간혹 있기야 있겠지만 홍상수에게 끝이라고 하는 사람은 비율적으로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김민희가 50대 여성 영화감독이었고 홍상수가 젊은 미남 배우였다면 네티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현재와 유사한 반응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꽃미남 배우 저게 먼저 꼬드겼다, 쟤 이제 끝났다’라고 하는 경우는 상당 부분 드물 거다. 오히려 세월을 이기지 못한 여성 영화감독의 외모에 대한 비하가 주를 이룰 거다.

사실은 말이다. 홍상수가 더 잘못했다. 당사자 둘이 합심해서 벌인 치정 사건에 경중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홍상수가 더 잘못했다. 왜? 더 큰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과 자녀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원래 안 친한 애가 괴롭힐 때보다 친한 애가 괴롭힐 때가 더 괴롭다. 가까운 걸 넘어 한때 사랑해 마지않던, 가장 친밀한 타인인 남편에게 받는 상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가 대상에 대해 상정한 기준이 도의라면 누가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는가에 대한 여부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홍상수를 더 비판했으면 비판했지 왜 김민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라는 거다. 예뻐서? 배우여서? 여자여서 그렇다. 정확히는 여자로서 배우의 직업을 선택해서 그렇다. 정말이다. 충무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차별에 동조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한다고 해 욕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여배우들이 느낀 바를 말했듯 김민희도 느끼는 바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 역시 성별을 바꿔 생각해 봐도 말 한마디에 이토록 가혹한 잣대가 적용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예계보다 엄격한 정치계. 유럽 같은 경우 대통령 영부인이 공식 석상에 노출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공직자가 성적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의 공무 수행 능력에 문제가 없다면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공과 사의 영역을 밀도 높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시.

그러니 이제 그만 우리도 유럽이나 프랑스처럼 쿨해지자고 하는 게 아니다. 쿨해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쿨할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의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 먼 산을 바라보는 거다. 불륜은 분명 잘못한 일이 맞다. 민사적으로, 도의적으로 잘못한 일이다. 민사 소송이야 부인께서 직접 제기하실 일이고, 그 전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는 각자가 바라보는 사회적 기준에 맞춰 비판을 하면 된다. 적어도 당사자들에게 똑같이. 도의적 기준이라고 하는 분류 체계, 그 분류 체계에 따른 분노, ‘분노의 공적 표현’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모종의 균형 감각인데, 나는 그걸 ‘젠더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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