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어요

“착하면 저만 손해인가요?” “잘해 주니까 만만하게 봐요.” 우리는 상대가 의도적으로 나를 격하시키기 위해 던진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서로의 레이더망이 다른 탓에, 허들의 높낮이가 다른 탓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상대가 성격 파탄자일 수도 있고 모르고 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 사과하고 돌이키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상대가 계속 개지랄을 떨 경우 그건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라 걔 문제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항상 나만 상처 받은 걸로 피해 사례와 정도를 극대화하고 왜곡하는 이유는 그게 편해서다. 일종의 확증 편향(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처럼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쾌와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배척하는 거다.

사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민폐를 끼친다. 물리적으로 길을 막기도 하고, 관념적으로 욕을 하기도, 사회적 기회비용을 대신 써 버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을 제공한다. 인간은 광의적으로 범용한 해소의 동물이다. 결핍이 생기면 해소를 해야 돼. 그게 잘 안되면 빡쳐. 어떤 일을 겪기 전에 미리 살짝 빡쳐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내는 대다수의 화는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 일례로 타인을 쉽게 혐오하고 타인의 외모를 잘 지적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경멸하며 스스로의 외모에 결핍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빈이나 김태희가 함부로 남 외모 잘 안 놀려.

좌우지간 지랄 발광을 하면 우리는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그리고 방어 기제의 일환으로 그게 예의나 범절, 매너였다고 착각을 한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나도 모르게 겁먹고, 쫄고, 떨고, 위축되고 굽신댄 건지, 진심과 충정으로부터 우러나온 겸손과 겸양의 자세인 건지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걔도 참 약하다. 걔한테 자꾸 불쌍하다, 불쌍하다, 하면 투사적 동일시 효과에 따라 진짜 불쌍한 애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약해. 약해서 강한 척하는 거다. 상대의 유약함을,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서다.

‘까칠해지자’. 그 누구도 완전한 내 편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 누구도 영원한 적일 거라 생각하지 마시라. 인간은 원래 별로다. 본인도 별로인 주제에 별로인 놈년들에게 지독하게 잘해 주지 마시라. 과도하게 예의 차리는 놈은 훗날 이해관계가 틀어져 돌변할 때 더 큰 괴리감을 안겨 주며, 싸가지 없는 놈은 늘 변함없이,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처럼 싸가지가 없고, 유머러스한 놈은 가볍게 이랬다저랬다 하며 실언을 남발한다.

크게 보면 우리도 그중 하나다. 고로 나에게 상처를 안겨 준 상대방이나 나나 따지고 보면 그 나물에 그 밥, 오십보백보, 도긴개긴이라는 수식을 정립해야 한다. 원수를 너무 미워하면 미움이라는 강력한 감정에 골몰해 우리도 모르게 적대자와의 동일시 과정을 겪게 돼 원수처럼 변해 버릴 수 있다. 사람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는 거 같아도 사실 논리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결국 특정 논리를 찾고 그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추진체는 감정이다. 불완전한 감정으로 작용하는 인간관계에 성공하려 들지 마시라. 그냥 인연과 악연이 있을 뿐이다. 전생 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그렇단 거다.

‘싸우자’. 다만 중요한 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단 거다. 선한 싸움은 맞짱을 뜻한다. 비열한 싸움, 개싸움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 주게 되지만 무엇보다 자괴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전적이 되기 때문이다. 선한 싸움의 경험은 엄연한 승리의 경험, 성공의 경험, 성장의 촉매, 자산의 축적이다. 까칠하되 선한 싸움을 싸줄 줄 아는, 을과 을의 싸움만큼 짠한 싸움도 없단 걸 깨닫는 ‘지적인 양아치’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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