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내가 살면서 무언가를 소유하면서 살아도 되나하는 죄책감이 있다. 어차피 소유한 것도 쥐뿔, 개뿔, 소뿔도 없지만 아무튼 그런 마음이 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적극적으로 이득을 보면 남이 적극적으로 피해를 본다. 내가 소극적으로 이득을 보면 남이 소극적으로 피해를 본다. 내가 가진 부는 남의 빈을 의미하며 내가 가진 빈은 남의 부를 의미한다. 이치다. 진리다. 작용, 반작용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랬던 내가 갑자기 변할 수도 있다는 거다. 적극적 이득과 부의 편리함을 깨닫게 되면서, 고급 스포츠카에 섹시한 모델들을 잔뜩 태우고 밤새 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얼굴만큼은 진지하달까!

헛소리다. 요는 누구나 저스틴 비버나 히틀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럴 만한 상황이 오면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도 믿지 마라. 공의로운 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무 것도 믿지 마라. 세상은 표리부동한 인간들로 가득하다.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표리부동하다. 문제는 ‘대놓고 많이’ 표리부동하며, 그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갈취하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의 특징. 꼰대다. 틈만 나면 얼핏 그럴싸한 독설을 늘어놓기 십상이다.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통념을 해체하고자 하는 독설에는 한번쯤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지만, 기존의 질서와 통념을 강화하려는 독설은 절대로 믿지 마라. 그건 그 독설을 하고 있는 자가 속한 계급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항시 외면의 도덕보다 내면의 양심에 집중해야 한다. 양심은 연민과 동정, 측은지심 따위와 연관되어 있지만 철학과 신념, 신조와도 긴밀히 내통하고 있다. 우리는 민감한 양심을 갈고 닦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야한다. 일종의 수양인데, 그런 수양을 통해 자아의 만족감을 넘어 영혼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도 자주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철학의 정립과 비례하여 성장하는 민감한 양심은 항상 본인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일정 부분 인간사의 핵심, 세계의 본질과 맞닿아있는 측면이 있다. 현대 예술의 기조라고 할 수 있는 ‘알 수 없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알 수 없는 작동 방식과 유사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일 알 수 없는 건 사기꾼의 속내다. 사람 좋게 웃다가도 자기 이권, 이익을 챙길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다. 그럴 때는 그에 맞춰 닭발을 내밀어라. 좌우지간 믿었던 인간이 지랄 버라이어티 쇼를 벌일 때, 그 황당함의 정도는 풍운의 뜻을 품고 6시간동안 상경해 들어간 회사 면접장에서 면접관이 서류를 보더니 약간 미안한 느낌으로 “너 토익 볼 때 자위했지?”라고 하는 걸 듣는 심경과 비슷할 수 있다.

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지대한 피해를 안기는 지랄발광 버라이어티 쇼를 벌이며 산다는 건 그만큼 깜냥이 떨어진다는 것, 민감한 양심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 즉, 자기 철학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무지한 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메멘토 모리’라고 하는 라틴어 경구가 있다.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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