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나는 두 번째로 방문한 유럽에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을 여행했다. 또다시 만난 파리는 설렘보다 반가움이 컸다. 샤를드골국제공항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에 에펠탑, 개선문, 루브르박물관 등 관광지 중심으로 돌아다녔다면, 이제는 퐁피두센터나 골목 곳곳을 누볐다.

강렬하게 기억나는 일화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독일 쾰른에서 열린 퀴어 페스티벌에서 겪은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일생일대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소위 말해 ‘젠더 감수성’이라고 하는 성별에 대한 인식에 성찰적 자각을 제공하게 되었다. 나는 남자다. 그렇다는 얘기는 일상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만적인 형태의 성차별과 성희롱, 성추행의 공포, 성폭행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단 얘기다.

쾰른 시내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문을 나설 때였다. 소파에 앉아있던 백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흑인이었던 녀석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잠깐 실례할게.” “뭔데?” “너 혹시 콘돔이 뭔지 알아?” 당황한 나머지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콘돔 뭐?” 그는 손짓으로 콘돔을 묘사했다. 그때 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눈을 흘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이상했다.

그렇게 나는 남성으로서 남성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인종차별이 아닌 성희롱을 당했다. 그들은 남성들끼리 모여 있던 동성애자 무리였고, 우리는 남녀가 섞여있던 이성애자 무리였다. 적어도 그 기간 동안 그 도시에서 나는 ‘성적 소수자’였다. ‘성적 다수자’가 ‘성적 소수자’를 경멸하고 조롱하던 방식 그대로 역할만 뒤집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평생토록 가지고 있던 줄도 모르고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무사안일주의, 가치관이 전복되는 걸 느꼈다.

두 번째는 프랑스 파리에서 겪은 일이다. 소르본느 대학 인근을 걷다 지쳐 레스토랑에 들어가 오믈렛을 주문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직접 요리를 했다. 음식을 다 먹고 할아버지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우리 가게에는 카드 결제기가 없는데?” 맙소사! “여기서 제일 가까운 은행이 어디죠?” 그는 약도를 그려주었다. 나는 현금을 찾으러 부랴부랴 은행으로 갔다. 여기서 잠깐! 나는 타고난 길치다. 일행은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나를 대신해 은행으로 향했고, 나는 의도치 않게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의중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걱정 마. 그냥 가도 좋아. 아무 문제없어. 너희는 젊고 나는 늙었잖아. 내가 그러면 이상하지만 너넨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대신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베풀어주면 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도 미소를 지었다. 인종과 세대의 장벽을 넘어 연대감이 느껴졌다. 나중에 내가 파리에 사는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세계의 젊은이들은 다 우리 집으로 와라. 수고하고 무거운 배낭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