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베이징 공항에 내리자마자 직원이 와서 중국어로 막 뭐라고 했다. 나는 중국어를 거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가이드북에서 본 아무 말이나 했다. “게이 워 피엔이 디알(깎아주세요).” 다른 직원이 와서 얼굴에 대고 중국어로 한참을 떠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너 사실 탕수육 먹었지?”라고 할 수 없어서 참았다.

만리장성을 가기 위해 신청한 그룹투어에는 미국인 할머니와 우루과이 가족, 칠레 부부 그리고 프랑스 모녀가 있었다.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하루 종일 관광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모녀와 친해졌다. 딸의 이름은 ‘사브리나’였다.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새 각별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항저우로 날아왔다. 나는 가난뱅이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중에 거의 돈이 없었다.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을 돌기 시작했다. 비쌌다(라기보다는 내가 거지였다). 문제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여긴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야. 이대로 밤이 되면 죽을지도 몰라.’ 심신이 지쳐 배가 고파졌다.

“한궈렌?” 레스토랑 직원이었다. 그녀는 우산을 씌워주더니 버스비도 내주었다. ‘무조건 수궈꿍이에서 내려야 돼.’ 버스에서 나는 뒷좌석에 앉은 할머니와 이렇게 대화했다. “수궈꿍이?” “수궈꿍이!”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영어로 된 안내방송조차 없었다. 다음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커피와 케이크를 사들고 그녀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갔다. “어제 날 왜 그렇게 친절하게 도와준 거야?” “왜냐하면 그게 나일 수도 있거든. 언젠가 한국을 여행하고 싶은데 어제의 네가 그때의 나일 수 있잖아.” 그녀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커피와 케이크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작은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어.”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숙소 직원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솽솽’이었다. 우리는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레스토랑에 갔다. 며칠이 흘렀다. 그녀는 고향에 내려가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아. 집안 어르신들이 널 결혼상대로 오해하실 거 같아.”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보고 싶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기차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상하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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