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도 그림자는 진다

그녀가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은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치열한 설전 끝에 그를 경찰에 고발했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녀의 부모는 결국 고발을 취소했다. “내가 모든 걸 걸고 이야기할게. 너 이거 취소하면 평생 후회할 거야.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나도 밖에 나가서 막 강간하고 다닐래. 어차피 고발도 안 당할 테니까!” 나는 여성으로서 성적 피해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극심한 아픔인지 알겠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부엌에서 칼자루를 손에 쥐고 머릿속으로 수천, 수만 번 복수를 연습했다. 지방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조만간 무슨 일을 벌일 거 같은데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너희 농장에 가서 당분간 지내도 되겠냐고 물었다. 신학의 길을 걷고 있는 오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냥 네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말해줘라. 나 이거 할까 하지말까?” “하지 마라.” 그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손을 잡아주었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친구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붙잡고 오열을 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엄청난 위로가 되어주었다. “야, 울지 마. 어떡해, 그래도 네가 전화를 했다는 건 내 생각이 났다는 건데. 아휴, 어떡해, 울지 마. 응?” 그럴수록 나는 더 큰 울음을 터뜨렸다. 전화를 끊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유치하게 내 이름을 마구 불러댔다. “울지 마, 운규야, 눈물 집어넣어, 걱정하지 마, 울지 마, 운규야,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운규야.”

나는 술에 취한 채 혼자 클럽으로 향했다. 막춤을 췄다. 아니, 몸부림을 쳤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주변의 시선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었고 내 옆에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제발 도와줘. 한번만 도와줘.” 그녀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뭘 어떻게 도와줘?” “집에 좀 데려다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침이라도 먹을래?” 하지만 그녀는 내가 너무 취해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지 못하자 그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잘 가.” 나는 말없이 기나긴 길을 걸어왔다. 발에서 피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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