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맑음

나는 공항철도에서 쇼핑백에 든 향수를 만지작거렸다. 향수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내일 항공권 끊어서 너 있는 곳으로 갈까?” “아냐. 나 혼자 시작한 여행이니까 나 혼자 끝내게 해줘.” “알았어. 그럼 올 때 마중 나갈게.” 지독한 짝사랑이었지만 그녀를 데리러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비행기의 굉음과 함께 사람들은 하나 둘 입국장으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혹시 다음 비행기를 탄 건 아닐까? 다음 비행기, 그 다음 비행기가 들어왔다. 서로를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이름 없는 얼굴들이 계속해서 스쳐지나갔다.

나는 안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를 찾는 방송은 로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렇게 수 시간이 흘렀다.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였다. 무사히 입국을 했다고 했다. 나를 찾는 방송을 했다고 했다. 전화기를 충전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왔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본의 아니게 불편한 사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 하혈했어.” “왜?” “…….” “말해봐. 무슨 일이야?” “섹스를 잘못했어.” “…….” “자해하면서 했어. 어떡해? 피가 안 멈춰.”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그대로 인천공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나는 쇼핑백에 담긴 향수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안내원에게 선물할까? 멈칫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현 듯 공항 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유리 상자 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워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시 또 한 걸음.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날 공항 밖의 날씨는 때때로 맑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여자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짙은 장미향이 났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