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초록지붕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우리 가족은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대망의 유럽! 네덜란드를 경유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바티칸시국), 스위스, 영국을 방문했다. 난생처음으로 나는 외국에서 혼자 용감하게 게임시디를 들고 계산대로 가 가격을 물어봤다. 푸른 눈의 외국인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비록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투어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해외여행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패키지투어에 참가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자연스럽게 세분화되었다.

단체로 온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식당에 들를 때마다 고추장을 꺼냈고 소주를 깠다. 누나들은 도도하게 와인을 마시며 허세를 부렸고 명품 모피코트를 산 뒤 면세를 피하기 위해 미리 코트를 입고 입국장에 줄을 섰다. 우리처럼 아이들과 함께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은 혼자서 온 여행객들과 건전하게 다녔다. 우리 가족은 그중 국정홍보처에서 일하던 홍 아주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주머니와 단둘이 콜로세움 근처를 거닐기도 했다. 파리에 도착하고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초록색 지붕을 가진 귀여운 호텔이었다. 다음날 조식뷔페에서 나는 블랙커피를 마셨다. 쓰고 맛없었다. 하지만 이국적인 느낌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가 아스팔트 위에서 텀블링을 했다.

사실 여행은 별 거 없었다. 가이드가 목적지에 다 왔다고 하면 버스에서 우르르 달려 나와 사진을 찍고 이동하는 거였다. 런던에서는 다 같이 빨간색 공중전화박스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영국인이 봤을 때 되게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집 앞 공중전화박스에서 웬 동양인들이 줄서서 사진을 찍고 있어.” 어느덧 여행이 끝나버렸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한 누나는 술에 취해 볼이 빨개진 채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묘하게 설렜다.

정이 든 홍 아주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주머니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글쎄다. 그 뒤로 수많은 여행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가장 설렜던 여행은 이 여행이다.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노년이 되었을 때, 초록색 지붕을 가진 작고 아담한 그 호텔에 다시 한 번 머물고 싶다. 그러나 텀블링은 절대로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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