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회

기준이란 건 참으로 주관적인 거다. 자신의 기준을 누군가에게 강권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객관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말의 합의는 존재하고 있는데,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합의적 가치가 객관이란 이름을 획득하게 되는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다. 지구에 수많은 사회가 있음에도 그리고 행복에 다양한 조건이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객관성 때문이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무엇보다 본연적으로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전부 불쌍하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생명체들이다. 투덜거릴지언정 결국 붙어있어야만 사는 부류들이다. 제대로 된 인간들과 함께 할 때 행복을 느끼며 제대로 된 인간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 불행을 느낀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을 때 그 가벼운 인사 한마디에 한마디를 더 하면 벌써 두 마디가 된다. 그러다보면 세 마디가 될 수도 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이전에 나눈 몇 마디가 떠올라 좀 더 친근한 미소로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는 거다. ‘인사치레’라도 좋다. 그 성의 없이 겉으로만 하는 인사 따위도 주고받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암담한 사회다.

표현에 있어 상대적으로 덜 경직된 서구 사회가 유난히 부러운 이유다. 미국을 비롯한 북중미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좀 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가끔 이곳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뜩이나 표현력이 떨어지는 동양 특유의 문화에 경제적 무질서, 그에 따른 무례함이 더해져 실망을 안긴다. 밥 먹듯 새치기를 당해도 이제는 바로잡으려 나서질 않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홀로 실망을 감내할 뿐이다.

안부를 건네자. 형식적인 인사 따위를 한없이 주고받자. 동네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점원은 로봇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다. 매일같이 계산대에서 마주하는 잠재적 이웃이다. 세상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결국 우리 젊은이들의 친구이듯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일순간 마음이 누그러진다. 다만 이 문제는 일방이 바꿀 수 없다. 적극적으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 눈을 마주치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나누고 싶다. 평화? 별 거 없다. 그게 평화다. 행복? 별 거 없다. 그런 게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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