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통상자

우리 집에는 커다란 구급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꼬마 시절의 나는 그걸 가지고 노는 게, 그걸 커다란 배로 상상하면서 노는 게 그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거보다 더 재미있었다. 빨간약은 악명 높은 선장이 되었고 붕대는 의사, 핀셋은 검술사가 되었다. 악명 높은 선장은 독한 럼주 대신 안약을 들이키곤 했다. 카드게임 역시 새롭게 창작을 해냈다. 기존에 있던 게임들은 뭔가 시시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따르기 싫은 게 아니라 그 규칙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들이 아쉬웠던 거다. ‘여기서 이렇게 되면 더 좋을 텐데. 의외로 이런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 예를 들면, 게임이 시작되고 중간쯤 되어 왠지 자신이 불리하게 되었을 때 규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규칙이다.

카드게임처럼 정적인 놀이에 질린 엄마와 나는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탁구를 치러 탁구장에 간 게 아니라 주로 손님들이 왔을 때 꺼내던 상을 펼치고 그 위에서 탁구를 쳤다. 그러다 자꾸만 아웃되는 공을 주우러 가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탁구공에 스카치테이프로 실을 붙여 천장에 매달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탁구공은 다소 진자 운동처럼 움직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용했다. 강력한 스매시로 인해 공이 아웃되면 재빨리 양손으로 실을 둘둘 휘감았다.

“엄마, 올림픽에도 이런 걸 도입하면 좋지 않을까요?” “국가대표 선수들이 단체로 실 감고 있니?” 정말로 다가오는 공을 앞으로만 쳐내면 됐다. 나중에는 서로 돌아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쳤다. 물론 그 외에도 단점들은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실 때문에 공이 잘 안 튀겨! 탁구를 치는데 공이 안 튀겨! 낯간지럽지만 나는 주변 어른들로부터 창의적인 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라났는데, 아마도 저런 어처구니없는 놀이들을 개발하면서 창의력이라면 창의력 같은 것들을 개발해낸 게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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