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

바닥에 사람이 쓰러졌다. 장소는 다름 아닌 교회. 나는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저씨, 좀 일어나 봐요.”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교회에 살던 노숙자로, 병원은 한사코 거부했다. 단지 배가 고파 기력이 없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넛 한 박스를 사다 줬다. 도넛을 본 그는 잠시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음, 이거 말고 저거 딸기 크림 집어 줘.’ ‘지금 맛을 가릴 처지냐!’

그때 주변에서 누군가 외쳤다. “괜찮아. 맨날 저래.” 뚱뚱한 노숙자 아줌마였다. ‘뭐 이 뚱땡아?’ 자세히 보니 정신 지체가 있는 거 같았다. 우리는 그 후 매주 빠짐없이 몇 달 동안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겨울도 오고 해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차라리 부산으로 내려갈까 해. 거기 괜찮은 노숙자 쉼터가 있대. 문제는 부산까지 갈 차비가 없어.” ‘결국 빌려 달라는 거냐!’ 나는 구시렁거리며 돈을 인출했다. “고마워. 여기 메모지에 이름하고 전화번호 좀 적어 줘. 나중에 꼭 갚을게.” 그렇게 첫 번째 친구와 통성명을 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두 번째 친구는 떡볶이 집 언니다. ‘언니네 떡볶이’라는 이름의 떡볶이 가게가 있었는데, 정식 가게라기보다는 건물 한구석에 위치한 노점상에 가까웠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와 함께 입장! ‘언니치고는 좀 늙지 않았니?’라는 생각과 함께 ‘진짜 따뜻한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언니는 우리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곤 했다. 차마 “저 불교인데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심지어 불교도 아니지만). 그냥 그 마음이 고마웠다. 기도라는 게 결국 남을 위해 마음을 써 준다는 거니까.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한지 오래되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밤낮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돈을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세 번째 친구는 다름 아닌 꼬부랑 할머니다. 동네에는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니던 꼬부랑 할머니가 있었고, 나는 가끔 할머니의 리어카를 대신 끌어 주고는 했다. ‘겁나 무겁잖아!’ 그래서 다시 “아까 잘하던데 재주를 살려 할멈이 몰지 그래?”라고 해 버렸다. 대신 할머니의 폐지 줍는 경로를 따라다니며 말동무를 해 줬다. 처음에는 노인네 장단에 맞춰 가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하다 보니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꼬부랑 할머니는 시장 사람들에게 “이 청년이 나 외로울까 봐 말동무해 주는 거 아녀.”라며 자랑을 했고,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손자 자랑을 했다.

세월이 흘렀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거나하게 취한 채로 동네를 활보하다 할머니를 봤다. 저 멀리서 여전히 폐지를 줍고 있었다. 창피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모른 척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날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비겁한 새끼였다. ‘노인네가 단 한 번이라도 더 내 눈앞에 띈다면 난 미친 듯이 달려가 폐지를 줍고 광란의 리어카를 몰아 줄 테다. 그리고 사과할 거다. 용서를 구할 거다. 절대로 창피하지 않다고 말할 거다. 손자들을 위해 폐지를 줍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할 거다.’

원래 친구란 그런 것이다. 여러 가지 희로애락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 우리는 모두 친구다. 한 번이라도 말을 섞게 되면 언젠가 다 그리워져 버린다. 고로 죽도록 혐오스러운 놈이 있다면 그게 설령 욕이나 육두문자일지언정 말을 주고받으면 안 되는 거다. 당장은 안 그럴 거 같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조금은, 적어도 아주 조금은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남녀노소 모두가 마찬가지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친구가 된다. 지금은 아무런 행방조차 알 수 없는 나의 친구들, 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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